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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정부 무능 드러낸 상하이 ‘댄서 시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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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호 34면

1948년 1월 사회국 문전에서 시위하고 있는 댄서들. 김명호 제공

1948년 1월 말 국민정부는 ‘댄스 금지령’을 발표했다. 상하이(上海) 시장 우궈전(吳國楨)은 행정원에 재고를 요청했다. 행정원장도 공감했지만 이미 법령으로 반포한 후였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89>

상하이의 댄스홀 주인들은 일부 업소를 폐쇄하기로 합의했다. 추첨을 통해 문 닫을 업소를 선정한 후 언론에 발표해 버렸다. 댄서와 업계 종사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공산당 지하조직은 호재라고 판단했다. 정치운동으로 연결시켰다.

1월 31일 수천 명의 댄서가 사회국 문전에 몰려가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 사회국은 댄스홀을 관장하는 기관이었을 뿐 금지 조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이날 댄서들은 그간 공짜 술이나 마시고 용돈이나 뜯어 가던 사회국원들에게 화풀이를 원 없이 했다. 도망가지 못한 국원들은 댄서들에게 멱살 잡히고, 따귀 맞고, 옷 찢기고, 뺨 물어 뜯기는 등 온갖 봉변을 당했지만 이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정부만 원망했다.

출동한 경찰은 797명을 현장에서 체포해 연행했지만 며칠 만에 모두 석방했고 폐쇄가 결정된 업소들도 영업을 계속했다. 되지도 않을 일을 법령이랍시고 반포하는 바람에 정부는 손으로 제 발등만 찍는 꼴이 돼 버렸다. 쓸데없는 말 한마디 내뱉은 정치 지도자처럼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민심이 서서히 국민당을 떠나고 내전도 거의 끝나 갈 무렵이었다.

댄스는 중국인의 오락이 아니었다. 중국에 와 있던 서양인과 매판(외국인 업체에 종사하는 중국인)들의 파티에나 가야 볼 수 있었다. 1920년대 초 한 광둥(廣東)인이 ‘블랙 캣(Black Cat·黑猫)’이라는 댄스홀을 상하이에 개업했다. 장소는 훙커우(虹口). 광둥인과 일본인 밀집 지역이었다. 사설 학원에서 댄스를 배운 경험이 있고 치파오가 잘 어울리는 여성 10여 명을 댄서로 고용했다. 새로운 직종의 출현이었다. 전통극이나 보고 집안에서 마작이나 하는 게 고작이었던 중국인들이 새로운 오락거리를 즐기기 위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떼돈을 번 블랙 캣은 중심가인 난징루(南京路)로 이전했다.

역사에 남을 만한 성아이눠(聖愛娜), 다두후이(大都會), 바이러먼(百樂門), 셴러쓰(仙樂斯)를 비롯해 독특한 풍격의 크고 작은 댄스홀들이 우후죽순처럼 문을 열었다.

푸젠(福建) 상인 왕신허가 세운 성아이눠는 위치가 좋았다. 성선회(盛宣懷)·이홍장(李鴻章) 등 청 말 명문의 후예들이 몰려 사는 곳이었다. 여름에는 공원을 빌려 늦은 밤까지 댄스를 즐기게 했다. 서민들도 삼삼오오 공원 한구석에서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댄서 출신들이 출자해 설립한 다두후이는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은행 간부와 매판들이 주로 출입해 분위기가 좋았다. 난쉰(南尋)의 4상(4象:난쉰에서는 은 1000만 냥 이상을 소유한 사람을 코끼리라고 불렀다) 중 한 사람인 구롄청(顧聯承)도 댄스홀을 차렸고, 아편으로 치부한 영국계 유대인 사쑨(Ellice Victor Sasson)도 바이러먼에 갔다가 홀대당하자 홧김에 셴러쓰를 차렸다. 구롄청이 은 70만 냥을 투자한 바이러먼은 호화로움과 규모가 동양 최고였다.

전화 교환수나 은행원·기자·교사 같은 직종을 시시하다며 걷어치우는 여성들이 늘어났다. 후일 미국에서 출간된 우궈전의 회고록에 의하면 48년 당시 상하이에는 8000여 명의 직업 댄서가 있었다. 월수입도 은행장들을 능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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