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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달러 133조원 풀고 또 풀어도 … 은행 금고로만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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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코스피지수가 전날보다 7% 가까이 떨어지며 1000선 밑으로 밀린 20일, 한 금융사 직원이 주가 그래프를 들여다보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돈을 뭉텅뭉텅 풀어도 돈은 돌지를 않고 있다.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에도 3개월짜리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는 지난달 초 이후 0.36%포인트 낮아지는 데 그쳤다. 은행 대출을 쓰고 있는 개인들에게까지 금리 인하의 온기가 미치지 못한 것이다. 같은 기간 3년 만기 회사채(AA-) 금리는 7.81%에서 8.68%로 오히려 올랐다. 기업의 자금 조달이 더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원인은 무엇보다 은행에 있다. 시중 자금을 끌어들여 이를 분배하는 은행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돈을 대도 아래로 흘러 내려가지 않는다. 은행도 돈을 풀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떨어지고 있어 시급히 자본을 늘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은행이 자본을 더 늘리지 않은 상태에서 대출을 늘리면 BIS 비율은 낮아진다. 한 시중은행 여신담당 부행장은 “국제신용평가사들이 대출이 늘어나는지를 뚫어지게 지켜보는 상황에선 쉽게 돈을 풀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국민은행은 지난주부터 창구에서 후순위채를 판매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1조2000억원에 육박하는 돈을 끌어들였다. 연 7.7%에 달하는 고금리에 시중 자금이 몰린 것이다. 신한은행도 17일부터 후순위채를 판매하기 시작해 3500억원가량을 모았다.


하지만 이 돈으로 은행이 대출을 늘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지금 은행들엔 대출로 수익을 올리기보다 BIS 비율 유지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또 은행이 높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한 만큼 대출 금리도 내려가기는 어렵다. 이동걸 금융연구원 원장은 “금융사들이 고금리로 돈을 끌어들일 뿐 돈을 빌려주는 건 꺼리고 있다”며 “지금은 수익성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든 버텨서 살아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은행의 지점들도 이런 분위기를 읽고 있다. 한 시중은행의 강남지역 지점장은 “본점에서 수신을 강조하는데 어느 간 큰 지점장이 대출에 열중하고 있겠느냐”며 “설령 본점에 대출 승인을 신청해도 통과되는 것보다 탈락하는 게 많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돈이 돌게 하려면 은행의 바닥 난 체력을 우선 회복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는 얘기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무작정 돈을 풀게 아니라 효과적으로 풀어야 한다”며 “지금은 은행의 BIS 비율을 높여 자금중개 기능을 살리는 게 급하다”고 지적했다.

한은의 후순위채 매입, 지급준비율 인하 등 보다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정조 리스크컨설팅코리아 사장은 “정부가 은행 후순위채를 사주는 것도 방법”이라며 “이를 통해 은행의 건전성이 높아지면 대출 여력이 생기고, 은행채나 CD를 덜 발행하게 돼 시장 금리도 낮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 안정을 위해선 금융당국 간의 고질적 ‘엇박자’를 없애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채권시장 안정펀드가 대표적이다. 13일 금융위는 10조원 규모의 펀드를 만들어 채권을 사들이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구체적 자금 조성 계획이 없어 혼란만 키웠다. 은행들이 기존에 보유한 회사채 등을 팔아 자금을 마련할 것이란 우려에 채권 금리는 오히려 오름세를 탔다. 금융위가 한은에 돈을 대달라고 ‘SOS’를 친 것은 그 후였다. 이에 한은은 “사전 협의 없이 발표했다”며 불쾌한 반응이다. 하지만 신속하게 대응해야 할 한은이 관할권을 따지면서 주춤주춤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날 이주열 한은 부총재보는 채권안정펀드와 관련, “24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지원 규모와 형태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정조 사장은 “이런 때에는 정부가 강력한 컨트롤 타워를 마련해 이해관계를 신속히 조정해야만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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