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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누가 이 국민을 위로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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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대사가 임명장을 받던 날 영국의 더타임스는 한국경제를 거북이에 비유했다.프랑스의 르 몽드는 하루앞서 우리경제가 멕시코를 닮아간다고 보도했다.
이 정부가 치적으로 내세우는 OECD가입의 티켓을 받아쥔 순간부터 한국경제는 비아냥의 대상이 된 것이다.짐작컨대 그들의 평가는 전국적인 파업사태에 영향을 받은 듯이 보인다.그러나 그런 보도를 접하는 우리 심정은 착잡하다.아니,슬프 다.
문민정부의 야심작이라던 신경제 5개년계획은 어디로 가고 집권4년에 이렇듯 거덜날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어디 경제뿐이랴.
국정 전반.사회 구석구석에 난맥상이 완연하다.개혁드라이브만 해도 그렇다.정권 초기엔 밑그림의 부재(不在)를 염려했는데 이제는 아예 정체불명이 돼버렸다.예컨대 노동정책의 경우 문민정부 첫 노동부장관의 정책노선과 현 장관의 노선은 판이하다.통일원의경우도 그렇다.또 안기부법의 첫 개정과 이번 개정이 그렇고,냉탕.온탕식 재벌정책이 그렇다.
원래 개혁작업이란 인기없는 정책을 대동하게 되고,따라서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그럼에도 이를 강행해야 하는 까닭은 더 큰희생과 고통을 다음 세대로 이월하지 않으려는데 있다.
그러나 이 문민정부는 초창기에 각 분야에서 호기를 부리다가 이제와서는 자신들조차 개혁의 당위성과 목표를 잊어버리고 만 것같다.물론 그들은 펄쩍 뛸 것이다.그러나 보자.지난 4년간 국민이 치른 희생과 고통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줬는지를.
정치를 말하는 국민의 입에선 육두문자가 튀어나온다.경제는 생산.소비.유통 각 분야에서 바닥으로 주저앉았고,중소기업은 도산의 비명을 지르고 있으며,주식시장은 최악의 폭락사태를 맞고 있다.실업률은 갈수록 높아져 고개숙인 아버지가 늘고 있다.단지.
등 따습고 배 부르고 마음 편하면 그뿐'인 국민들은 단 4년만에 춥고 배고프고 불안해졌다.
그래서일까.존경하는 역사인물 조사에서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이 만년 1위였던 세종대왕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고,주부들 사이에선 全씨를 다시 불러내라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가 회자된다.
현실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렇게라도 자위하고 싶었 겠는가.아니면 현정권에 대한 불신을 빗대어 표시한 것이리라.
하지만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정부의 시국관,아니 대통령의 현실인식이다.결론부터 말한다면 국민의 시각과 너무 괴리가 큰 나머지 개탄하고 말고 할 심정도 아니다.어느 집권세력이든 다소간은 독선적일 수 있지만 현정권의 독선은 이제무지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준다.정권안보차원에서라도 어떻게 이렇듯 철저히 국민과 담을 쌓을 수 있는가.지난주 연두회견에서 도덕성과 절차의 정당성을 무시한 날치기에 대해 한마디 유감표시조차 않는 대통령을 보았을 때 ,또 야당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발언에 접했을 때 아마도 국민들은 돌아앉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옛 말씀에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치지 말라고 했다.야당의 연금작전이 정도를 벗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날치기나 대화단절의 명분이 될 수는 없다.더구나 작금의 사태는 그 속에서 파국의 징후를 읽기에 충분할 만큼 불안하다.설 사 시국관의차이가 있다 해도 정치가 대화를 본령으로 하는 한 만나고 싶다는데 이를 거절할 까닭이 없다.불러서도 만나고 찾아가서도 만나야 한다.인식의 갭이 크면 클수록 더욱 그렇다.그런데 지난날 군부집권시대에도 흔치 않았던 대화단절 이 이른바 문민시대에,그것도 국민이 묻는데 일언지하에 일축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독선이아니고 무엇이랴.
민주사회의 가장 무서운 적은 언로(言路) 단절이다.집권세력이야 마치 신병처럼.앉아 일어서'에 동원된다 해도 눈감아줄 수 있지만 국민이 뽑은 반대당이 외면당하는 것은 바로 국민이 당하는 것과 같다.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 이다.더구나민주화를 내걸고 집권한 처지가 아닌가.그래서 국민은 지금 여러모로 슬프다.정치가 구실 못해 슬프고,안보가 불안해 슬프고,경제불황이 깊어 슬프고,사회기강이 무너져 슬프다.누가 이 슬픈 국민을 위로하나.이 시대의 화두(話頭 )다.
◇필자 약력▶76세▶5선의원▶신민당 사무총장.부총재,국회부의장▶저서.못다 이룬 민주의 꿈' 高 興 門 高興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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