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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가르히 25명, 5개월 새 2300억 달러 날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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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호 28면

영국 프로축구 첼시 구단주로 유명한 러시아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42). 미국발 금융위기 전만 해도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개인재산 235억 달러.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3월에 선정한 세계 부호 순위 15위, 러시아 부호 순위 2위에 올랐다. 그는 살아있는 유대인 중 최고 부자로 꼽혔다. 2003년 1억4000만 달러에 첼시를 매입한 뒤 미국 대통령 전용기에 버금가는 보잉-767 전용기를 타고 모스크바·런던을 오가며 좋아하는 축구 경기를 즐겼다. 재산 목록에는 대당 6500만 달러나 하는 전용 헬기 2대, 대당 1억 달러를 호가하는 호화 요트 3척, 영국·프랑스에서 각각 2000만~5000만 달러를 호가하는 저택과 별장 7채가 들어 있었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추락하는 러시아 신흥재벌들

그는 재혼 상대인 17살 연하의 모델 출신 약혼녀 다리야 주코바에게 30만 달러짜리 명품 웨딩드레스를 주문해 주며 거침없이 돈자랑을 했다. 이렇게 잘나가던 아브라모비치가 요즘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금융위기 여파로 갖고 있는 러시아 철강기업과 영국 광산회사 등의 지분가치가 폭락해 200억 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봤기 때문이다. 첼시 구단의 스타 선수 중 몸값이 비싼 스타들과의 계약 파기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아브라모비치는 “축제를 벌일 시간도 없고 그럴 기분도 아니다”며 지난달 말 잡혔던 결혼식을 무기한 연기했다.

아브라모비치 같은 러시아 신흥 재벌들이 금융위기와 국제유가 폭락의 직격탄을 맞고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들은 소련 붕괴 직후인 1990년대 국유 재산 민영화 과정에서 온갖 편법과 불법을 써 막대한 부를 축적해왔다. ‘올리가르히’로 불리는 이들은 대부분 자원·에너지 관련 기업들을 갖고 있다. 원자재값 상승으로 엄청난 부(富)를 움켜쥐자 최근 2~3년 새 해외 자산 사냥에 열을 올렸다. 3월 포브스지 조사에서 개인재산 10억 달러 이상의 세계 억만장자 1125명 가운데 러시아인은 87명이나 됐다. 미국에 이어 둘째로 많았다. 5월 러시아판 포브스지에는 110명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경쟁하듯 최고급 주택과 사치품을 사들이고, 세계 유명 관광지를 돌아다니며 돈을 뿌렸다. 한 번에 수백만 달러를 주고 세계적 팝스타나 여배우들을 초대해 호화판 축제를 벌이는 것도 예사였다.

그런데 5월 시작된 원자재값 하락, 8월 그루지야 전쟁, 9월 금융위기 등 악재들이 겹치면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러시아 증시에서 올리가르히 소유 기업들의 주가가 곤두박질치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모스크바 증시의 RTS지수는 5월 19일 최고점(2487)을 찍은 뒤 지난달 6일 866으로 추락했다. 현재 600선에 근접하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5월 중순부터 약 5개월 동안 러시아 최고 부호 25인의 재산이 2300억 달러나 줄었다고 전했다. 포브스 명단에 이름을 올린 올리가르히 중 상당수가 빈털터리가 될 위기에 처했다. 러시아판 포브스 편집장 막심 카슈린스키는 “올리가르히의 절반이 내년도 포브스 명단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이는 러시아 최고 재벌 올렉 데리파스카(40). 세계 최대 알루미늄 기업 루살의 소유주다. 연초만 해도 개인재산 280억 달러로 세계 부호 순위 9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 150억 달러 이상을 잃었다. 세계 21위 부호인 블라디미르 리신(52·노보리페츠크 철강 콤비나트 대주주)도 지분 가치 하락으로 220억 달러를 날렸다. 철강회사 세베르스탈의 소유주 알렉세이 모르다쇼프(43·세계 18위)도 보유주식 가격이 80% 이상 떨어져 160억 달러를 잃었다. 투자회사 알파그룹의 미하일 프리드만 회장(44·20위)이 120억 달러, 거대 석유기업 루코일의 대주주 바키트 알렉페로프(58·56위)가 110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봤다.

회사 지분을 담보로 국내외 은행에서 돈을 빌려 무리하게 기업을 확장하던 올리가르히들은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다. 데리파스카는 갚아야 할 빚이 140억 달러에 달한다. 캐나다 자동차 부품회사 마그나 인터내셔널과 독일 대형 건설사 호흐티프(Hochtief)의 소유 지분을 급히 처분했지만 그것도 모자라 구제금융을 해 달라고 정부에 손을 벌리는 신세가 됐다.

구제금융을 책임진 대외경제은행은 45억 달러를 긴급 지원했다. 데리파스카가 노릴스크 니켈(러시아 최대 니켈 생산 기업) 지분 25%를 담보로 골드먼삭스·모건스탠리 등으로부터 빌린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하면 이 지분이 외국인 손에 넘어가기 때문이다. 국가 전략산업을 외국에 빼앗기는 상황은 블라디미르 푸틴(전임 대통령) 총리의 국내외 위상 추락을 초래할 수 있다. 프리드만의 알파그룹도 20억 달러를 지원받았다. 그는 러시아 2위 통신업체 빔펠콤의 지분 44%를 담보로 독일 도이체방크로부터 같은 액수를 대출받았다 지분 가치 하락으로 추가 담보를 내놓으라는 요구에 시달렸다. 외채 상환 압박을 받는 것은 이들뿐만 아니다. 러시아 중앙은행 평가에 따르면 대기업들은 연말까지 475억 달러, 내년에 1600억 달러의 외채를 상환해야 한다.

푸틴의 재계 장악력 강화될 듯
올리가르히의 몰락은 최고실력자 푸틴 전 대통령의 위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외신들은 러시아를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린 푸틴의 8년 치적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국내 경제가 흔들리면 세계무대에서의 발언권도 약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위기가 푸틴에게 오히려 정치적 기회가 될 것이란 분석도 있다. 구제금융을 통해 올리가르히들을 길들이고 전략산업에 대한 국가 통제를 더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기 때문이다. 이를 방증하듯 러시아 정부 청사 복도는 연일 기업인들의 행렬로 넘쳐나고 있다고 현지 언론은 전한다. 구제금융을 얻기 위해 고위 관료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은 최근 “구제금융을 신청한 기업들이 쇄도해 전체 요청액이 1000억 달러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정부가 기업·은행 구제를 위해 배정한 500억 달러의 두 배나 된다. 구제금융 분배 여부에 따라 기업들의 생사가 갈릴 수 있다. 러시아 엘리트연구센터 올가 크리슈타놉스카야 소장은 “올리가르히들의 세력 약화로 푸틴이 전략산업에 대한 통제를 한층 강화할 것”이라며 “위기가 끝나면 국가 지분이 늘어날 것이고, 푸틴과 가까운 측근·기업에 특혜를 주는 방향으로 자산 재분배가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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