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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신춘문예 당선작 경향분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신춘문예 당선작들은 지금 한국문학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면서앞으로 나아갈 방향까지 점치게 한다.
현재 펼쳐지고 있는 문학의 갖가지 경향의 한 부분씩을 가장 세련되고 압축적으로 보여준 작품만이 당선권에 들 수 있다.또 그런 작품중 기성 문단에 뭔가 충격을 주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소망까지 충족시킬 수 있어야 당선작으 로 흔쾌히 뽑힐 수 있기 때문이다.
올 중앙일간지 신춘문예 시.소설에 대한 전반적인 평은 혼과 땀을 더 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창작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묻고 또 물어가며 쓴 작품,문장 한줄 한줄에 땀이 배어 있는 작품이 드물었다.
이야기가 분명치 않고 상상력이 빈곤했다는 것이 각 일간지 정초에 실린 심사평이다.때문에 97년도 신춘문예는 좀 더 대담한상상력과 독창성,그리고 각고의 글쓰기를 요구하며 어렵게 당선작들을 골라낼 수밖에 없었음이 작품 자체와 심사평 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당선 소설들은 우선 따뜻한 가족관계 혹은 인간관계를 모색하며현재 우리 사회에도 전통적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를 묻고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중앙일보 당선작.향기와 칼날'(은현희)은 젊은 여성을 내세워대대로 양조장을 하는 아버지 슬하에서의 따뜻한 회상과 함께 술중독에 빠진 남편과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동아일보의.전갈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유경희)도 아버지의 품안에서 나와 이제 세파에 부딪치며 살아야 하는 한 여인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한국일보의 당선소설.어머니의 산'(김혜진)도 어머니.남편,그리고 아들로 이어지는 가족관계,그 사랑을 전통적 정서로 파고 들고 있다.위 세 작품이 여성의 시각에서 가족관계,혹은 사랑을묘파하고 있다면 서울신문의.아내는 지금 서울에 있습니다'(김창식)는 부부교사,그 남편의 시각으로 아내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나직나직 호소하듯 다루고 있다.
경향신문의.유쾌한 바나나씨의 하루'(우광훈)와 세계일보의.이구아나는 멸종하지 않는다'(박영현)는 90년대 나타난 신세대 글쓰기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바나나에 씌운 콘돔 광고에서 발상을 얻은.유쾌한…'는 가벼운 문체로 정보. 상징.언어등이 실체가 돼버린 우리 사회에서 본질을 찾고 있으며.이구아나…'는 운석이 떨어져 종말을 앞둔 시점에서 인간.인간성의 의미를찾고 있는 작품이다.한없이 가볍게 읽히는 이들 작품의 정반대 쪽에 조선일보의.시 쓰는 남자'(류시 영)가 놓인다.한편의 시를 놓고 평론가와 시인을 내세워 진행되는 이 작품은 문학.인간의 존재의미라는 심각한 주제를 물고 늘어지고 있어 제대로 읽어내기에 여간 힘들지 않다.
당선시들의 편차도 소설 만큼 크다.
당선작 없이 가작으로 두편 뽑은 중앙일보의.가족 일기'(이용규)는 가족.고향에 대한 그리움을,.안개 바다'(이성일)는 삶의 근원적 고독과 그리움을 담고 있고 경향신문의 당선작.외출'(김창진)은 삭막하고 무의미한 도시생활에서도 자연 을 그리워하는 소시민들의 보편적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이에 반해 동아일보의.나는 날마다 전송된다'(배용제)와 조선일보의.220번지 첫번째 길가 7호'(박균수)는 더이상 전통적정서로 묘사할 수 있는 현실은 없다는듯 현대인의 삭막한 내면 풍경을 감각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미 정서적으로 망가진 현실을 구차스럽게 전통적 정서에 맞닿아 파고들거나 철저히 현대적 정서 처리의 비인간성도 보기 싫다는듯 한국일보는 짧막한 서정시.야경'(이대의)을 당선작으로 밀었다. 그 시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눈덮인 고향마을에서의 개 짖는 소리가 들릴듯도한 전통적 서정시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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