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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김영희 칼럼

남북관계, 어디까지 후퇴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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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북한이 히스테리를 부린 두 번째 단계는 남한의 일부 인권단체들이 북한으로 많은 전단을 띄워보내고 한국이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의 공동 제안국이 된 데 대한 격렬한 반응으로 나왔다. 북한은 한국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민간 단체들의 전단 보내기를 효과적으로 금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북한은 일반론으로도 한국 정부가 그런 조치를 취할 법적 수단이 없다는 것을 모를 것이고, 각론적으로는 시민단체들 사이에 정부의 말발이 서지 않는다는 것을 알 턱이 없다. 한국 정부도 지체없이 시민단체들의 자제를 요청하는 성명 하나쯤 내는 게 좋았지만 한국판 네오콘(신보수파)들의 융통성없는 안목에 발목 잡혀 있는 이 대통령에게 그런 발상을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비현실적이었다. 특히 한국이 유엔에서 북한 인권결의안의 공동 발의국이 되는 것을 본 북한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누린 남북 밀월관계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흥분했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발의한 북한 인권결의안에도 기권한 한국이 찬성의 단계를 뛰어넘어 공동 발의국이 된 것은 이명박 정부의 현명하지 못한 결정이다.

북한은 지금 모든 압박카드를 남한에 휘두른다. 앞으로 더 나올 것이다. 판문점 남북 직통전화를 끊고, 금강산과 개성 관광 길의 군사분계선 통행을 더 강력히 통제하겠다는 통보는 이미 후퇴하고 있는 남북관계를 한층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까 걱정이다. 그러나 북한의 조치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상징성은 있지만 이명박 정부에 실질적인 타격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명을 지르는 것은 개성공단에 들어가 있는 남한 기업과 그들의 협력업체다. 금강산 특수를 누리던 강원도 고성군의 숙박업소·식당이 속속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다. 이쪽에서 힘껏 주먹을 날리는데 상대방이 아파하지 않고 빙긋 웃으면서 여유를 부린다면 참으로 맥빠지는 일이다. 북한의 일련의 도발에 대해 때로는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는 이 대통령의 반응은 아마도 북한 지도부를 더욱 자극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강도를 높인 조치를 궁리 중일 것이다.

이 대통령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북·미 간에 비핵화와 관계 개선에 관한 새로운 장이 열리려는 때다. 이 대통령은 이번 미국 방문 길에 오바마와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무신론자 김정일을 본능적으로 혐오하는 부시는 이 대통령의 신성동맹이다. 오바마는 소수파와 약자와 패자를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하고 열린 마음의 소유자다. 그의 외교·안보팀은 북한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오바마는 대선 기간 김정일과의 회담도 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김정일의 건강이 허락하면 북·미관계가 오바마의 방북과 관계 정상화 논의까지 나갈 수도 있다.

북한이 핵시설 시료 채취 문제에 오리발을 내밀지만 그건 처음부터 북·미 합의에 잠재된 문제다. 오바마 정부와의 협상에서 지렛대를 확보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우리가 기다리기 전략에 의지해 남북관계의 후퇴를 오래 방치하면 우리 이해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북·미 합의 이행의 비용만 뒤집어쓸 수도 있다. 이 대통령은 오바마 정부 출범이 예고하는 글로벌 변화의 규모를 잘 읽어야 한다. 6·15 선언과 10·4 합의를 수용한 국회 개원연설로 돌아가야 한다. 금융위기의 쓰나미로 살기가 어려운데 남북관계라도 조용해야지. 통미봉남(通美封南) 따위가 두려운 게 아니라 기회손실이 걱정인 것이다.

김영희 국제 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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