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우먼>금호건설 또순이 이재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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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남성만의 고유영역으로 치부돼온 건설현장에서 억센 남자들과 어깨를 부대끼며 사는 처녀 건축기사.평소에는 얌전하지만 현장 점검에는 매섭고 당찬 또순이.
금호건설 여성 현장건축기사 1호로 서울종로구도렴동 금호그룹 사옥 신축공사현장에서 근무하는 이재은(李在恩.25)씨는“말로만남녀평등을 외치기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힘든 현장근무를 자원했다”고 말한다.
91년 보성여고 졸업을 앞둔 李씨는“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설분야가 미래의 유망직종”이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경원대 건축학과에 입학했다.남학생과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길은 오직 실력밖에없다는 각오로 노력한 끝에 4학년때 건축기사 1 급과 안전기사1급 자격증을 따냈다.
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접한 뒤로 李씨는 하루빨리 현장에뛰어들어 이같은 사고를 방지하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단다.
건설현장에서 건축기사는 공정 전반을 관리.감독하는 것이 업무.군대로 치면 일선 소대장역이다.95년초 금호건설에 입사한뒤 본사 공사1팀에 배속돼 일반 안전.공정관리업무등을 맡았던 李씨는 현장에서 뛰고싶어 올 7월 그룹사옥 신축 현장 소장을 찾아“맡겨만 주면 남자 건축기사 이상으로 잘할 수 있다”고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현장근무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그러나 건설현장은 그녀에게.금녀의 벽'의 연속이었다.현장인부들이 여자기사의 말을 잘 따르지 않는데다 밤샘근 무가 잦은 업종 특성상여성 자체를 기피하기 때문.
“어느날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갔는데 안전모를 쓰지 않고 들고 있던 한 인부가 안전모를 땅바닥에 팽개치며.어디 한번 찍어보라'고 소리칠때 말문이 막혔지요.나를 안전점검차 나온 것으로오해하고 반발심을 나타냈던 것입니다.또한 슬금슬금 피하기만 하고 아예 상대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 애를 먹었어요.” 이러한 냉대를 극복하는 길은 성실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 李씨는남보다 1시간 빠른 오전6시에 출근하는등 모범을 보였다.
“터파기 공사가 진행되면서 양쪽 흙막이벽의 쏠림 방지를 위해설치한 스트러트(H빔)에 장착된 계측기를 매일 점검했죠.지하에서 13 높이에 있어 처음엔 무서웠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죠.
이제는 익숙해져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왠지 불안해 요.” 李씨는 인부들과 어울려 술도 같이 마시다 보니 소주1병에 폭탄주 3~4잔은 거뜬히 비우는 준(準)술꾼이 됐단다.현장생활 석달째께부터는 인부들이 자진해서 일을 챙겨줘 아무런 불편없이 지낼수있었다. “결혼요.한달에 이틀만 쉬는데 데이트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그래서 건설현장과 결혼했죠.” 李씨는“앞으로 우리나라최초의 여성현장소장이 되는 것이 꿈”이라며 안전모를 쓰고 현장으로 총총히 걸어나갔다.

<김현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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