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목판 팔만대장경을 동판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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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보 제32호이자 세계문화유산인 목판(木版) 팔만대장경을 동판(銅版)으로 다시 제작하는 작업이 착수됐다. 이 불사를 진행 중인 해인사는 17일 3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동판 팔만대장경 결정판을 부처님에게 바치는 봉정식을 치렀다. 770년 전 고려인들이 외세 몽골을 물리치기 위해 불심을 모아 만든 팔만대장경은 천년 수명의 나무 재질이라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져 없어질 위험이 있었다. 이제 팔만대장경은 1만년 이상 보존이 가능한 동판 재질로 복원되기 때문에 그러한 우려를 씻게 됐다. 소중한 민족문화유산이 영구보존의 길을 찾았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반갑다.

해인사가 이번 불사를 추진하며 보여준 '열린 마음'도 눈길을 끈다. 200억원이 들어가는 대형 불사를 앞두고 해인사는 불교의 울타리를 넘어 각계 종교 지도자를 찾아 도움을 청했다. 이에 호응하여 지난해 11월 연 팔만대장경의 동판 복원 고불식(부처님께 고하는 의식)이나 어제 마련한 봉정식(부처님께 물건을 올리는 의식)에 기독교와 가톨릭 등 여러 종교인이 물심 양면으로 힘을 보탰다. 우리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범교파적 협력은 신선하고도 인상적이다. 이번에 보여준 종교 간 화해의 정신이 우리 사회 전반의 상생과 통합의 전범이 되길 기대해 본다.

세민 주지스님은 2006년 완성될 동판 팔만대장경 한 질을 북한에 보내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대장경이 품고 있는 큰 뜻이 남북 화해와 민족 동질성 회복에도 이바지하길 빈다.

우리 종교계는 교회와 사찰을 망라해 규모와 호화로움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왔다. 으리으리한 절이나 교회, 최대.최고의 불상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영원한 깨달음이 큰 건물에서나 큰 불상을 통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종교의 세속화는 비종교인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돼 왔다. 이번 대장경 불사는 그 같은 외형의 집착에서 벗어나 실질을 모색한 점에서 평가받을 만하다. 이런 새로운 움직임이 종교계에 확대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