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비정규직 고용시한 늘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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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금융위기는 한숨 돌렸지만 고통스러운 실물경제 침체가 기다리고 있다. 이미 감원 한파는 몰아치기 시작했다. 며칠 전 쌍용자동차는 내년 9월 재고용 검토를 전제로 비정규직 근로자 350여 명을 한꺼번에 내보냈다.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업종 전반에 걸쳐 대규모 구조조정이 추진되고 있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의 말처럼 “이제부터 정책 화두는 물가가 아니라 고용이 될 것”이란 말이 피부와 와닿는 상황이다.

엊그제 정부와 한나라당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의무시점을 고용 후 2년에서 3∼4년으로 연장하는 비정규직 보호법 개정안을 마련 중”이라고 밝혔다. 반면 노동계는 무조건 의무시점을 1년으로 앞당기자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벌어질 대량 실직 사태를 막기 위해서도 일단은 의무시점 기간을 연장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3월 말 현재 비정규직 근로자 수는 전체 임금 근로자의 35%에 해당하는 564만여 명에 이른다. 이 중 100만 명 이상이 100인 이하 영세업체에 속해 있다. 내년 7월이면 이들 업체도 법에 따라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든지, 아니면 해고를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의무시점 연장은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을 줄여주면서 비정규직의 대량 실직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시점 연장이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최선책은 아니다. 당장의 불을 끄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구인·구직 시장을 탄력적으로 만들고,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차별 대우를 개선하지 못하면 비정규직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선진국처럼 눈높이를 낮추면 언제라도 다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안정적인 구인·구직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 같은 작업장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두 배 가까운 임금을 받는 현실도 비정규직 문제를 심각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결국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일자리 시장을 유연하게 만드는 일이다.

유럽의 경우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마찬가지로 계약기간이 없다. 근로조건은 정규직과 동일하고 급여도 노동시간에 비례해 받는다. 정규직을 고사하는 자발적 비정규직들이 많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차별 처우 금지’ 원칙이 법에 의해 철저히 준수되기 때문이다. 미국도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임금차별을 받는 일이 많지 않다. 잘 갖춰진 구인·구직 시스템으로 직장을 그만두더라도 언제라도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우리도 이런 수준의 노동시장 환경을 만들면 구태여 비정규직의 고용기간을 법적으로 정할 필요도 없어진다. 얼마 전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오랜만에 의견을 같이했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하루 이틀에 될 일이 아니다. 노·사·정은 국가 장래를 걸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각계각층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근로자 3명 중 1명이 비정규직인 우리는 비정규직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