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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실업과 유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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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경기후퇴(recession)와 불황(depression)은 구분하기 모호하다. 누구도 1980년 로널드 레이건만큼 명쾌하게 비교하지 못했다. “이웃사람이 일자리를 잃으면 경기후퇴고, 내가 직장에서 잘리면 불황”이라고. 그는 슬쩍 상대 후보를 밟아주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경기 회복은 (경제를 망친) 지미 카터 후보가 드디어 실업자가 됐다는 뜻입니다.” 당초 참모진은 개인의 생존이 걸린 실업은 너무 위험한 소재라며 만류했다. 레이건은 역발상을 주문했다. 그는 그해 미국 대선에서 이 유머 한 방으로 압승했다.

74년의 공포영화‘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 엽기적인 살인과 식인 행위를 담고 있다. 주인공인 살인마 3형제는 원래 시골의 소 도살장에서 일하던 순진한 인물. 시대가 변하고 자신들의 기술이 쓸모 없어지자 그 분노와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 무자비하게 인간을 도살한다. B급 영화인 이 작품이 평단의 호평을 받은 것도 이런 사회의식 때문이다. 당시 1차 오일쇼크로 미국에는 실업이 만연했다. 실업은 일시적인 함정이 아니라 끔찍한 가위눌림을 동반하는 ‘헤어날 수 없는 덫’으로 인식됐다.

경제학 교과서는 대량 실업을 가장 위험한 경제 현상으로 간주한다. 자연재해나 전쟁보다 훨씬 파괴적이다. 삶이 무너지고 가정은 파괴된다. 홈스와 레이히의 보고서(67년)에 따르면 인간이 받는 스트레스 가운데 직장에서의 해고는 8위에 해당한다.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배우자나 가족의 죽음, 이혼, 감옥살이뿐이다. 해고에 따른 후유증을 조사한 보고서도 있다. 잃는 것은 임금·안정감·자신감·꿈·가족관계·사회적 지위 등 13가지나 된다. 대신 얻는 것은 빚·알코올·부부싸움·고독감·권위 상실 등 12가지라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해고 광풍이 일고 있다. 내년 미국의 실업률은 82년 불황(10.8%)과 90년 불황(7.8%)의 중간쯤으로 추산된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해고를 알리는 뉴스가 지면을 채우고, 권고사직·명예퇴직이란 단어가 초겨울 칼바람보다 스산하다. 그렇다고 대량 실업을 막기 위한 뾰쪽한 해법은 없다. 딱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공공투자를 확 늘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정규직·비정규직이 서로 양보해 견뎌 나가는 길이다. 어느 때보다 노·사·정 대타협이 절실하다. 여기저기서 마구 전기톱이 춤춰서야 되겠는가. 실업마저 유머로 삼은 레이건식 여유가 부럽다. 우리도 조금씩 양보할 순 없을까.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