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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펀한 놀이판 “인생역전 신바람 불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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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아이고. 영·호남 못난이들이 팍 둘러 앉았네. 자∼ 하객들한테 신고식부터 하고…”

하천 둔치 자갈밭 가운데서 각설이 패들이 깡통을 숟가락으로 두드리며 인사를 했다. 한바탕 각설이 타령이 지나가자 배우와 관중이 따로 없다. 타령을 따라 하던 관중들이 어느새 각설이 패의 모자와 깡통까지 빼앗아 공연 판을 주도해 버렸다. 빙 둘러 앉아 박수를 치던 관중들도 모두 자갈밭 가운데로 나서 질펀한 판이 어우러졌다.

영·호남 못난이 소리·춤 큰잔치가 8일 경남 하동 화개장터에서 열렸다. 사진은 광주 어린이 풍물단원들이 설장구 공연을 하고 있는모습. [송봉근 기자]


“어허 마음 내키면 너거들(너희들) 마음대로 놀아버려.”

모자와 깡통을 빼앗긴 각설이 패들이 공연을 중단하고 들어가도 판은 끝날 줄 몰랐다.

8일 섬진강 가에 위치한 경남 하동군 화개면 화개천 둔치에서 ‘영·호남 못난이 소리·춤 큰잔치’가 펼쳐졌다.

이날 잔치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엉덩이가 배기는 것도 잊은 채 자갈밭에 앉았다가 흥이 나면 놀이판 가운데로 뛰어 들었다. 마치 ‘7080 노래방’을 옮겨 놓은 듯했다. 스피커가 설치된 주변에는 솟대와 돌탑을 쌓는 등 소박한 놀이판이었지만 판을 벌인 사람들은 쟁쟁하다.

김지하 시인과 백기완 선생, 송기인 신부, 김열규 교수, 허병섭 목사 등이 고문을 맡았다. 김호남 학교법인 근화학원(전남 목포중앙고) 이사장과 쌍계사 주지인 휴봉 석상훈 스님, 김동곤 쌍계제다 대표 등이 대회장을 맡았다. 사단법인 민족미학연구소와 화개면 이장단 협의회가 주관했다. 김지하 시인이 지난 여름 목포 ‘우수 민족극 한마당’ 특강에서 제안한 뒤 5차례 준비모임 끝에 열렸다.

왜 못난이 잔치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대회사로 낭독된 김지하 시인의 시 ‘형님’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중략)시름 지친 잔주름살 환히 펴고요. 형님 있는 놈만 논답니까. 사람은 매한가지 도동동당동 우라질 것 놉시다요. 지지리도 못생긴 가난뱅이끼리- ”

예술감독을 맡은 채희완 민족미학연구소 소장(부산대 교수)은 “잘 살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신바람을 불어 넣어 역전의 기회를 주기 위한 영·호남 화합 잔치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행사 전체에서 역전의 힘이 배게 프로그램을 짰다. 전통적으로 경상도는 탈춤을 잘 추고 전라도는 판소리가 유명하다. 이번 행사는 반대로 경상도 소리꾼과 전라도 춤꾼이 주도하고, 광대·이야기꾼·풍물패·마당극 놀이패 등 40여개 팀이 함께 했다. 서로 자기 지역이 아니라 상대 지역에서 잘하는 분야를 고른 것이다.

전라도 춤꾼들인 무진농악단·굴림놀이패·신명놀이패(이상 광주)와 우도농악보존회(영광) 등이 그러하고, 경상도 소리꾼 홍순연·허경미·양일동(이상 부산)과 손양희(창원)이 또 그렇다.

놀이판은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 쌍계사 주지 휴봉 스님도 대중 앞에서 ‘망향가’를 한 곡 뽑았다. 부산지역 대학연합보컬그룹 ‘블루웨이브’가 화개장터를 록 버전으로 부르자 흥은 극에 달했다. 해가 지자 광주 타악그룹 ‘얼쑤’가 물이 튀고 불이 활활 타오르는 북을 두드리는 ‘인수화풍’(人水火風) 공연을 하며 행사가 막을 내렸다.

영·호남 ‘한살림’과 화개면 주민들은 떡국과 음식을 무료로 내놓았다. 목포의 홍어와 부산의 장어를 섞은 회무침이 특히 인기를 끌었다. 광주 구당 뜸사랑 봉사단은 사람들에게 뜸을 떠 줬다. 대회장인 김호남 근화학원 이사장은 “소리와 춤에 끼가 있는 영호남의 예술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며 “올해는 예비 대회 격으로 치렀고, 내년부터는 본 행사를 개최해 더욱 많은 분들이 올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김상진·이해석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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