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세돌 ‘비수’냐 … 구리의 ‘장검’이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큰 상금이 걸리면 더욱 강해지는 이세돌 9단이 우승상금 2억5000만원이 걸린 제13회 LG배 세계기왕전에서 박영훈 9단의 대마를 잡고 결승에 올랐다. 5일 제주도에서 벌어진 대회 준결승전 결과다. 기대를 모았던 이창호 9단은 중국의 구리 9단에게 1집반 차로 패배했다. 결승은 1983년생 동갑내기인 이세돌 대 구리. 일진일퇴의 숙적 관계인 한국랭킹 1위 이세돌과 중국랭킹 1위 구리가 사상 첫 세계대회 결승전을 치르게 됐다. 세계 최강의 자리를 놓고 혈전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과 중국엔 이정표가 될 한판 승부가 될 것 같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결승전이 너무 멀다는 것(내년 2월 23일 백담사). 그래도 워낙 주목되는 일전이라 이 두 사람의 기풍과 전적을 비교해 보는 것은 의미 있을 것이다.

◆이세돌 9단과 구리 9단=두 기사의 기풍은 전투적이고 높은 위험을 마다하지 않으며 상대의 도전에 꼬리를 내리는 일은 없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차이는 있다. 같은 고양잇과의 맹수라도 구리의 발톱이 크고 둔중하다면 이세돌의 발톱은 좀 더 가늘고 날카롭다. 칼에 비유한다면 구리가 장도를 쓴다면 이세돌은 닿기만 해도 피가 섬뜩 배어 나오는 비수를 쓰고, 구리가 정면에서 대든다면 이세돌은 좀 더 은밀한 자객처럼 움직인다는 점이다. 구리의 바둑은 약간의 허세랄까 폼을 재는 구석이 있었는데 요즘은 타고난 수읽기 능력에다 형세에 대한 균형감이 높아지면서 점차 독일전차 같은 중량감을 띠기 시작했다.

이세돌은 공격도 즐기지만 공격 받는 것도 즐긴다. 실리에 대한 본능적인 선호 때문인데 이 바람에 종종 지리멸렬의 상태에서 고전하는 경우가 있다. 두터운 바둑을 구사할 때 승률이 높아지는 것을 보면 가끔 발생하는 엷음으로 인한 고전은 마음만 먹으면 없어질 약점이라 할 수 있다. 한번 승기를 잡으면 촌보도 늦추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이는 강철 같은 파괴력과 집중력은 당대 발군이다. 이세돌이 지닌 최고의 장점일 수 있다. 구리는 낙관파에 속하는데 이 바람에 형세가 유리할 경우 방심하거나 터무니없는 완착을 두곤 한다. 한때 ‘세계 최고의 아마추어’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가늘고 섬세한 몸을 지녔지만 일발필도의 치명타를 지닌 이세돌. 그에겐 승부사 특유의 운명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배어 있다. 운동선수 같은 몸에 말술도 마다하지 않는 호협풍의 구리와 대비된다.

◆지금까지의 전적은 3승4패=전적표에서 보듯 이세돌 9단은 공식 기전에서 구리에게 3승4패로 밀리고 있다. 구리 9단의 만만치 않은 저력을 말해준다. 중국리그 전적까지 합하면 딱 5대 5. 참으로 호적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년 전의 첫 대결(삼성화재배 준결승)은 이세돌 승리. 그러나 마지막 대결(2008년 6월 후지쓰배 8강전)은 구리의 승리. 이세돌 9단은 “갚아줄 빚이 있다”고 결승 임전 소감을 밝혔는데 바로 이 마지막 대국을 말하는 것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LG배 준결승전 하이라이트=○ 구리 9단, ● 이창호 9단

백을 쥔 구리 9단이 1로 이은 장면. 여기서 이창호 9단이 A에 못질을 하면 실리에선 흑이 확연히 앞서게 된다. A는 하도 커서 눈감고 차지하고 싶은 곳. 그러나 이 9단은 좌측 흑 두 개의 대마가 약간 엷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 9단은 고심 끝에 2로 인내하고 말았는데 이는 물론 형세가 나쁘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이 5를 차지하자 바둑은 미세해졌고 이후 치열한 마무리 싸움 끝에 흑은 1집 반을 지게 된다. 이창호의 기풍으로는 위험을 알면서 A에 두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지만 프로들의 중론을 종합할 때 흑2로 A에 두었더라면 승산이 높았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좌측 대마는 좀 시달리겠지만 백5를 내준 뒤에 겪어야 했던 어려움에 비하면 소소할 수도 있었기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