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스님을 만나다-16년전 속세의 대변자에서 선계의 중계자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지광스님은 인터뷰 요청을 몇번이나 뿌리쳤다.이유는 두 가지다.어차피 종교는 찾아오는 사람의 마음이 절실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데,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찾아오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고,또 하나는 개인적인 이력을 자꾸 기사화해서 자료로 인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사람은 변하는데 과거의 가시적인 이력으로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7일 오후 능인선원 원장실에서 그를 만났을 때 개인이력은 ‘최소한’으로 쓴다는 약속부터 해야 했다.올해 46세인 그가 불교에 입문한 것은 80년.신군부의 언론탄압이 극심했던 당시에 그는 한국일보 기자로 근무했다.이전까지 그의 인생행로는 외관상 탄탄대로였다.원주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하는 아이’로 소문이 났고,서울고와 서울공대를 나왔다.신문기자가 되고도 그는 ‘혈기왕성하고 적극적이며 술도 센 기자’였으며 79년에는 ‘돌뿌리 우정’을 타이틀곡으로 한 독집음반을 낼 만큼 노래솜씨도 뛰어났다.

그러나 80년의 언론탄압은 속세의 대변자인 기자에서 정신의 중계자인 승려로 그의 인생행로를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됐다.사전 검열을 받기 위해 서울시청 검열단 사무실을 드나들던 그는 농성의 주동자로 찍혔다.그 직후 그는 신문사를 떴다.머리를 깎고 지리산의 토굴로 들어가 불경만 읽었고,82년에는 가족과 인연도 끊었다.그리고 85년에는 산으로 찾아와 그의 설법을 듣던 신도들의 권유로 서울로 돌아왔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자비와 지혜인데,그건 결국 하나의 베풂이라고 생각했습니다.제가 본 불교신자들 중에는 기본경전인 반야심경의 의미도 모르고 주문처럼 암송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저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는 것이 베푸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수행과 포교는 결국 하나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깨달음의 생활화’라는 생각으로 능인선원을 열었다고 한다.그래서 전달자의 역할에 신경을 좀 더 쓴 것일뿐 다른 스님과 차이는 없다고 한다.새벽3시30분에 일어나 하루평균 여덟시간을 설법하는 강행군을 그는 계속하고 있다.사찰운영은 모두 신도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한달 1백50만원의 봉급을 받는 수행승으로 살고 있다. “사람들이 능인선원이 성장하는 걸 보고 자꾸 외형적인데서 그 비결을 찾으려하는게 안타깝습니다.전 그런 사람들에게 매일 새벽3시 1천여명이 기도하러 나오는 광경을 한번 보라고 권합니다.종교는 결국 얼마나 내면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느냐의 문제고 사찰은 여건을 만들어 주는 역할만 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졌다.서론없이 바로 주제를 끄집어내면서도 예시하는 사례의 적확성에 힘입어 일사천리로 이어지는 어법이 인상적이었다. <글: 남재일·사진: 안성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