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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문화기행>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상상 속의 비엔나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이 없었다/상상 속의 비엔나엔 요한슈트라우스의 왈츠가 흐르지 않았다/내 상상 속의 비엔나는 바하만의 도시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 유럽지도를 펴놓고 갈 곳을 표시하며 빈(비엔나)에 동그라미를 칠 때 머릿속에 오스트리아 시인 잉게보르크바하만의 시구가 맴돌았었다.
“누구든 떠날 때는 머리카락 날리며 떠나야 한다 사랑을 위하여 차린 식탁을 바다에다 뒤엎고 잔에 남은 포도주를 바닷속에 따르고 피 한 방울 뿌려서 바닷물에 섞고….” 로마의 어느 호텔에서 담뱃불에 타 죽었다는,자살인지 사고인지 알 수 없는 의문의 죽음으로 마흔일곱의 생애를 마감한 시인이 청춘을 보낸 곳.내 상상 속의 빈은 그런 곳이었다.
1996년 6월28일 아침 8시40분쯤 빈 남역에 도착했다.
프라하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7시간 넘게 잠도 제대로 못자고 달려온 직후라 몹시 피곤했다.일단 역의 수하물보관소에 짐을 맡기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마땅한 숙소를 찾아보기로 했 다.역 안의카페에서 빵과 따뜻한 차 한잔으로 다소 원기를 회복한 뒤 전차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역에서 멀어질수록 거리 풍경이 고풍스럽게 변해간다.이제까지 내가 거쳐 왔던 유럽의 도시들과는 달리 시가지의 규모가 큰 게 눈에 띄었다.
길들이 매우 넓고 거리는 덩치가 어마어마한 육중한 건물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약간의 낭패감을 맛보아야 했다.도저히 그 차가운 견고함을 뚫고 살아있는 삶의 냄새를 맡을 자신이 없었던 까닭이다.아무리 걸어도 초라한 뒷골목 하나 발견할 수 있을 것같지 않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 부근에서 전차를 내렸다.조금 걷자 바로크양식의 웅장하고 화려한 석조건물들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끝없이 이어지는 돌덩이들의 위풍당당한 행렬이 장관이다.아,하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이것이 바로 궁정이라는 거구나.이것이 바로 절대왕정이라는 거구나.빈의 사치와 호화의 도도함에 비하면 런던이나 뮌헨은 촌스러운 시골처럼 생각될 정도다.정말 엄청나게 꾸미고 살았구나.한때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남부독일.스페인.네덜란드.보헤미아.헝가리.밀라노등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었던 제국,그 옛날 합스부르크 왕가의 부와 영광을 상징하는 거대한 광장에 서서 나는 잠시 넋을 잃었다.권력이란 이런 것이었나.
이 인공의 광휘를,이 위선의 허세를 누리고자 역사 이래로 인간들이 그토록 피 터지게 싸웠던가.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왕이 왕비를 독살했던가.어제의 사랑을 배신하고 오늘의 우정을 저버렸던가.그 막강한 권좌의 그늘에서 숱한 무고한 생명 들이 이슬처럼 스러졌던가.상상 속의 빈이 어느새 지워지고 역사와 현실의 빈이 떠오르는 아침이었다.
〈시인〉 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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