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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北 김용화씨 증언 북한의 국군.미군포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김용화씨가 이번 본지에 국군.미군 생존자 부분을 증언한 의미는 상당하다.그간 국군.미군 포로 생존자 얘기가 자주 거론됐지만 구체적으로 신원을 말한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다음은 金씨의 포로에 관한 증언이다.
◇국군포로=탈북 당시 60세 가량이던 김갑생씨는 165㎝가량의 키에 마른 체격이었다.북한에서 결혼해 부인및 2남1녀와 함께 살았다.그가 국군포로라는 사실은 지역인민반 5호담당제 선전원이 갖고 있던 신원성분관계 서류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같은 동네의 윤세인(당시 60세 가량).영춘(당시 53세 가량)씨 형제 역시.국군포로'라는 소문이 파다했다.이들은 채소를재배하는.남새반'에서 일했다.형은 165㎝가량의 키에 마른 체격이었다.동생은 160㎝ 정도에 통통한 체격.역 시 경상도 말투였다. 대개의 국군포로는 사상범으로 몰려 수용소등에 갇혀 있었다.개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가정을 꾸리고 함경남도 검덕이나황해도 송림등지에서 살았다.이들 가족은 항상 감시를 받으며 탄광.용광로.채석장등 고된 작업장에서 일했다.76년 판문 점 도끼만행사건등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이들중 상당수가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함경남도 창성의 정치부21호 관리소등으로 끌려갔다. ◇미군포로=71년 태천비행장에서 40일 정도 지내며 만난 한 외국인에게 계속 말을 걸자 그 노란 눈의 남자는 조금씩 자신의 얘기를 털어놨다.
그는“내 이름은 존 스미스,19세이던 52년 미군으로 참전해첫 전투인 함경남도 장진에서 동료 1명과 함께 포로가 됐다”고말했다.그는(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 위로 총을 쏘는 시늉을 하며)“이 자세로 총알 딱 세발 쏴보고 붙잡혔다 ”며“같이 잡힌동료는 이미 죽었다”고 덧붙였다.
부대에서 번역일을 하며 틈틈이 노역을 하던 그는“이미 미국에돌아가는 것은 포기했지만 여기서라도 결혼해 가정을 꾸려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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