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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시애틀에서의 斷想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필자는 지금 미국 워싱턴대의 강연요청으로 시애틀에 머무르고 있다.숙소인 이곳의 한 호텔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저 길거리에는 수많은 자동차들이 굴러간다.포드.크라이슬러.BMW.볼보.아우디.폴크스바겐.사브.도요타.미쓰비시.닛산….미국 이 인간전시장을 방불케 하듯 미국의 길거리도 자동차전시장이라고 할 만하다.숫자로 보면 결코 미국산 자동차가 더 많다고 하기도 어려울 듯하다.일본의 자동차가 가장 많은 듯싶고 유럽산도 적지 않다.
한국의 현대자동차도 가끔 눈에 띈다.기 아의 세피아를 발견한 것은 차라리 즐거움이다.
필자가 92년 미국에서 1년을 보내게 돼 어떤 자동차를 구입할 것인지 현지 유학생들에게 자문을 구한 적이 있다.1년후 자동차를 되팔 때의 가격,이른바.리세일 밸류'는 일본차가 좋다는데 이론이 없었다.계산은 간단했다.그래도 한국산 자동차를 놔두고,그것도 일본차를 산다는 것이 켕겨 결국 한국차를 선택하고 말았다.그러나 새차임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션에서 오일이 새기 시작하더니 사소한 몇군데에 고장이 나 적지 않은 돈을 소비하고 말았다.한국차를 타지 않는 교민이나 유학생을 이상하게 바라볼 이유를 잃고 만 것은 물론이었다.
지난 3일 미국 유수의 광고대행사 보젤 월드와이드와 갤럽조사연구소가 기자회견을 갖고 발표한 96세계소비자의식조사 결과를 중앙일보 서북미판이 1면에 전하고 있다.일본.독일.미국.영국등으로 나가는 순위 가운데 한국은 11위에 그쳤다는 것이다.문제는 중국.대만에도 뒤처진다는 사실이었다.이미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는 한국이 겨우 최근에서야 공업화를 본격 추진한 중국 제품만큼도 세계소비자들로부터 신뢰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충격이아닐 수 없었다.올해말까지 외채가 다시 1천억달러에 이르고,올해의 무역역조가 11월말 현재 1백95억달러에 이른다는 보도가결코 우연이 아님을 이제야 알겠다.
최근 노동법 개정과 관련해 최종현(崔鍾賢)전경련 회장은 국회경쟁력강화특위와의 간담회에서“기업은 그동안 노동집약적 산업에서기술.자본집약적 산업으로 전환하려 노력하고 있으나 10~20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동남아순방때 김영삼 (金泳三)대통령에게 5년간 모든 기업체 직원 임금동결.금리 대폭인하등을 포함한 긴급명령을 건의했다”고 발표했다.고도기술.자본집약적 산업국가로 발전해야 한다는 지상명제는 이미 80년대초의 과제였다.그호경기에 그 과제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놓고 지금 와서모든 직원의 임금을 동결하기 위한 헌법상의 긴급명령을 선포해야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렵다..잘되면 자기탓,못되면 조상탓'이라는 말처럼 어려울 때 정부가 지원하고 국민이 성원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정부와 국민에게 똑같은 요청을 하고 있는셈이다. 일본 노동성이 93년도 세계노동자의 임금을 비교한 결과 한국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미국 노동자의 65%에 지나지 않았다.더구나 국민연금을 포함해 한국의 사회보장이 선진국보다 훨씬 열악한 사정임을 감안하면 노동자 임금을 동결하자는 제 안이설득력을 지닐까.
최근 호화소비재의 수입이 급증하고 이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높다.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정신운동이 일어나는 것이 옳다.그러나 이제 애국심에 호소하거나,정부의 보호나 지원에 의존하거나,비상한 방법에 의해 경제를 운용하는 시대는 지났 다.노동법 개정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기업이 노동자들의 염원을 전향적으로 인정해주면서 더욱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노동자들을 설득하는것이 온당할 듯하다.
소비자들인 국민에게도 국산품을 제대로 만들고,서비스를 제대로개선해 놓은 다음 물건을 사고 서비스를 이용하라는 것이 당연하다.가장 값싸게,가장 좋은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의 욕망을 언제나 짓누를 수는 없는 법이다.
서울거리가 외제차로 넘쳐나는 시애틀 거리와 다르리라는 법은 없다.온실 속에서 자라온 기업들이 이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과 개방의 물결을 타고 밀려드는 외국 상품과 서비스 앞에서 언제까지 정부와 국민의 품안에서 어리광부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본란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朴 元 淳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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