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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던 낀세대 하나둘 떠난다 30대 新엑서더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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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누군가 내 어깨를 치고 있다. 누구인가 또 어느 슬픈 죽음이 눈이 되어 흩날리고 있는가. 이곳은 서울의 끝.오늘 하루 눈이 내려 우리들 꿈의 귀가 길은 아득하고, 시린 어깨를 감싸는 젊은 가장의 등 뒤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김완준의 ‘신월동의 눈’중)

김씨는 언젠가 이런 시를 썼다.사회의 초년병으로 출판사에서 일하던 20대 초반.저녁을 먹고 헤어져 귀가하던 선배의 뒷모습이 작아 보일 때였다.그리고 10년이 흘렀다.김씨가 사는 곳은 연세대 앞의 6평 남짓한 원룸.그는 여기서 아침마다 승용차로 북한산 입구의 직장까지 통근한다.대중문화잡지 ‘상상’을 내고 양귀자·이문열·이인화를 필자로 둔 살림출판사의 기획실장겸 상상편집장이 그의 직함.5년을 아이디어·활자와 접대술 속에 묻혀 살았지만 요즘은 한가하다. 이미 사표를 낸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가 사표생각을 한 것은 올여름 뉴질랜드를 다녀온 뒤부터다.거기서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두명의 여자를 만났다.3년전 이주해 한국도서대여점을 하는 잡지사 기자 출신의 이모(35)씨와 4년전 건너가 관광가이드를 하는 엄모(39)씨.두사람 모두 30대에 단신으로 갔다가 정착하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이다.서울로 돌아온 김씨는 사회생활 10년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봤다.나이 34세,재산 5천만원,체중증가 12㎏,흡연·음주량 2배 증가.얻은 것은 수치로 환산이 되는데 잃은 것이 무엇인지는 숫자로 나타낼 수 없었다.“5년뒤에는 무엇이 달라질까” 김씨는 자신에게 되물었다.답은 다시 바뀐 ‘수치뿐’일게 뻔했다. 내년 2월 김씨는 뉴질랜드 오클랜드로 떠난다.어학연수로 등록하고 기간을 연장하면서 2년 정도 있을 계획이다.예상 비용은 3천만원.매달 학비 50만원과 최저생활비로 60만원을 잡은 액수다.취업비자가 없는 김씨로서는 2년간 재산의 60%를 고스란히 써야하는 셈이다.그런데도 김씨는 이번 여행은 잃을게 없다고 한다.“2년뒤 뉴질랜드에 눌러앉을 수도 있고 미국·영국등 다른 영어권 국가로 갈 수도 있고,한국으로 돌아와도 무방하다.어떤 경우든 때가 밀릴 정도로 복잡한 서울의 소모적인 경쟁에 2년을 더 몸담고 있는 것보다 나빠질게 없다는 생각이다.최소한 2년을 ‘살아보고 싶은 생활’을 해보고 언어와 생활양식이라도 배우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김씨의 계획은 대책없는 출국처럼 보이기도 한다.그러나 20대 후반에서 30대 직장인들중에 김씨와 ‘닮은꼴’이 점증하고 있다.

CIO프랑스 유학원’의 경우 한달 평균 열다섯건의 유학사례중 한건 정도는 30대 남자의 어학연수고, 20대후반 여자는 전체의 20%에 달한다.원장 석손숙(39)씨는 “처음 문을 연 7년전에는 거의 학생들이었는데 2∼3년전부터 직장 다니다 그만두고 떠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며 “가장 최근에 어학연수를 떠난 사람은 35세의 한국토지공사 과장이었다”고 말했다.

70년대 농민의 무작정 상경을 연상시키는 이들 직장인의 ‘신 엑서더스’가 입학허가를 받고 출국하는 ‘학위유학’과 다른 점은 ‘좋은 나이때 삶의 질을 높여 살아보는 것’이 목적의 반이라는 것.

사회학자 김종엽씨는 “국제화 시대에 필요한 언어나 생활양식을 배우는 것이 ‘노는 생활’을 통해 가능한데다 서울의 생활비면 해외체재가 가능하기 때문에 붐이 일어나는 것같다”고 진단한다.그러나 해외에 나간다고 ‘삶을 즐기며 배운다’는 두마리 토끼 사냥에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관계기사 38면〉

이들 ‘유목민’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배교식(31)씨는 한양대 졸업후 한국공업표준협회에서 3년 근무하다 생활이 너무 답답해 과감하게 사표를 냈다.일단 영어를 배우자는 생각으로 95년말 비교적 물가가 싸고 연수비가 적게 드는 영국 웨일스의 카디프로 어학연수를 갔다.틈틈이 유럽여행도 했다.돈이 떨어질 무렵인 올 10월 그가 찾은 새로운 길은 캐나다에서 변호사가 되는 것.삶의 질이 세계 최고수준이고 한국인도 많아 뭔가 길이 많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다.배씨는 일단 귀국해 아르바이트하면서 법학공부를 위한 책을 읽고 있다.돈이 마련되는대로 캐나다로 떠나기 위해서다.배씨의 경우는 해외체류가 탐색용 엑서더스가 된 셈이다.

최문선(26)씨도 미대 졸업 직후 배씨와 비슷한 이유로 영국으로 떠났다.여성들의 억압된 직장생활은 처음부터 미련이 없었다.그림과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그녀는 어학원에 다니며 런던의 쇼핑가를 섭렵했다.그러다 직접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어 산업디자인을 가르치는 대학에 들어갔다.이제 학비도 직접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관광가이드 자격증을 따는 공부도 시작했다.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결혼은 필요하면 이곳에서 하면 된다.영국인도 관계없다.마음 맞고 이해해줄 수 있는 인물이면 된다.최씨는 탐색여행이 이주(移住)로 발전한 경우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닌 제3의 부류가 있다.‘선진국 바이러스’에 감염돼 돌아올 생각도 없고,거기서 삶의 방편을 찾지도 못한채 부유하는 ‘국제 떠돌이’.불문학 공부를 위해 파리에서 어학연수중인 소설가 신이현씨의 신작 ‘갈매기 호텔’은 바로 이들의 얘기다.내년 ‘상상’봄·여름호에 연재한후 곧바로 출간될 예정인 이 소설은 센강변의 갈매기 호텔이 무대다.그곳은 자신들이 있어야 할 바다에 있지 못하고 강변으로 날아든 각국의 ‘갈매기’들이 모이는 장소다.

소설의 스토리는 허구지만 상황은 신씨가 직접 파리에서 본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소설속의 주인공은 나중에 서울로 돌아가는데도 현재 파리의 떠돌이들은 어디로 갈지 모른다.분명한 것은 앞으로 당분간 미지를 찾아 모험에 찬 비행을 하는 갈매기들이 늘어나리라는 것.

사회학자 김성기씨는 이 ‘신 엑서더스’를 “고도산업사회로 접어드는 입구에서 나타나는 중산층 소비주의의 한 형태”라면서 “10년전 일본의 중산층 화이트칼라들에게 나타난 해외체류 바람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진단한다.

<남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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