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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문화기행>프라하 중앙역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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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원래 프라하에선 최소한 사나흘은 머무를 예정이었다.나로선 최초의 동구권 여행이라 진작부터 마음이 설레고 만감이 교차했었다.
그러나 그날 오후8시쯤 역에 도착한지 채 한시간도 되기 전 어서 빨리 이 우울한 도시를 뜨고 싶었다.어둡고 썰렁 한 역사에는 가로등 하나 켜있지 않았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게 을씨년스럽고 지저분해 보였다.그리고 또 오줌냄새는 얼마나 코를 찌르던지.밖으로 통하는 에스컬레이터가 없어 할 수 없이 무거운 가방을끌고 비좁은 지하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프라하 중앙역 청사에 들어서서 가장 놀란 것은 돈을 바꿔주는사설 환전소가 수십 군데나 널려 있다는 사실이었다.여기가 도대체 역 안인지 시장바닥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크고 작은 환전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이들은 대개 높은 수수료를 받고호텔예약과 여행안내도 겸해 수입을 늘리고 있었다.유럽의 다른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심지어 무질서하기로 악명높은 이탈리아에서조차 역 안의 환전은구내은행에서만 취급한다.물론 암달러상들이 호객행위를 하는 것은막을 수 없지만 프라하에서처럼 개인이 버젓이 요란한 간판을 내걸고 영업하지는 못한다.미국 달러화와 서유럽 부자나라들의 통화를 크게 새겨 넣은 유치하고 조잡한 간판들을 지나치면서 좀 씁쓸했다.사회주의를 경험한 나라는 적어도 이래야 된다는 나의 얄팍한 상식이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었다.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체제 사이에서 부유하는 체코 사회의 현재를엿본 것같아 안쓰러웠다.
역안엔 여행객을 위한 중요 표지판이 제대로 붙어 있지 않아 화장실을 찾느라 30분가량 헤맸다.이미 런던에서 뮌헨까지 몇 바퀴 돌며 서유럽의 편리한 시설과 제도에 맛을 들인 뒤라 그런지 프라하의 불편함과 비합리는 내게 참을 수 없는 짜증을 불러일으켰다.그리고 이처럼 겉으로 드러난 사실들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의 어둡고 침울한 표정이었다.술에 취해 무어라떠들며 돌아다니는 남자들의 공허한 시선과 삶에 찌들고 무기력해보이는 얼굴들에서.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느껴야 했기에.그렇지 않아도 우울할 일이 많은데 일부러 우울을 찾아다닐 건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하룻밤도 자지 않고 역 바깥으로 한 걸음도 나가보지 않은 채 그날 밤 서둘러 프라하를 떠났다.왜 그렇게 쫓기듯 떠나야 했을까.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무언가를 두려워했던게아닌가.나는 동구권 사회주의에 대해 아직도 환상 을 갖고 있는사람은 아니다.그것이 우리만의,나만의 짝사랑이었음을 아프게 인정한지 벌써 오래다.그래서 말하자면,깨질 환상조차 없으므로 논리적으로는 프라하를 두려워 못 볼 이유가 하나도 없다.그러나…그러나 논리를 넘어,상식을 넘어 나를 넘어서 사회주의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여전히 내 속에 남아 있는지 모른다.이것은 무슨거창한 이데올로기 이전에 정서의 문제다.내 머리와 입은 그를 배반해도 가슴은 그를 못잊는다고나 할까.다시 한 번 송두리째 깨지고 싶지 않았는 지도 모른다.그래서 나는 그 도시를 외면했던 것인가.
〈시인〉 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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