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 가계 대출까지 조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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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얼어붙은 은행 창구가 좀처럼 해동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정부와 금융감독 당국이 갖가지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백약이 무효다. 은행들은 중소기업 대출에 이어 가계대출까지 조이고 있다. 일부 은행은 지난달 중순부터 이미 신규 주택담보대출을 중단했고, 또 다른 은행은 이달부터 신규 대출을 더 이상 받지 않기로 했다.

3일 국민은행에 따르면 증가세를 보이던 주택담보대출 잔액은 지난달 감소세로 돌아섰다. 9월 말 71조1219억원에서 10월 말 71조585억원으로 634억원 줄어든 것이다. 하나은행의 주택담보대출 잔액 역시 전달보다 줄었다. 잔액이 줄지 않은 다른 은행들도 상반기에 비해 증가세가 크게 더뎌졌다.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대출할 돈은 별로 없는데 정부는 자꾸 중소기업에 돈을 풀라고 한다”며 “가계대출을 줄여 이를 중소기업에 풀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은 만기 연장을 해줄 뿐, 신규 주택담보대출은 올 스톱 상태”라고 덧붙였다.

정부와 금융감독 당국은 최근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들며 은행에 돈을 풀라고 요구해 왔다. 그러나 좀처럼 시중은행들의 돈주머니는 풀리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장 제 코가 석 자이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마다 연말 건전성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며 “가뜩이나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떨어져 어려운 데다 한층 강화된 건전성 기준이 올해 도입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계 금융위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건전성 관리는 은행엔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한 시중은행장은 “외국인 주주들의 반발이 심해 은행이 함부로 대출자산을 늘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며 “정부가 시키는 대로 무리해 대출을 늘렸다가 외국인 주주들이 다 떠나면 누가 책임질 건가”라고 되물었다. 그는 또 “올 초 강화된 BIS 기준 도입 이후 3개월만 연체돼도 부실로 처리해야 한다”며 “ 정부가 책임지지 못할 ‘묻지마 대출’을 밀어붙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돈을 풀되 건전성도 유지하라는 정부와 금융감독 당국의 주문도 은행들을 헷갈리게 하는 부분이다. 금융당국은 한쪽으로는 은행에 중소기업과 가계에 자금을 지원하라면서 다른 한편에선 은행의 외형 경쟁을 자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원화 유동성 비율 완화로 은행권에서 100조원 안팎의 추가 대출 여력이 생겼다지만 아직까지 대출 확대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경제연구본부장은 “정부와 중앙은행이 푼 돈이 가계와 기업까지 가는 데는 시차가 있다”며 “정부의 유동성 공급만으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금리 추가 인하 등의 방법이 있긴 하지만 역시 당장 효과를 내기 어렵다”며 “돈을 충분히 풀고 있는 만큼 시장의 자금 경색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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