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교의 아름다움에 눈멀고, 슬픔에 마음 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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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정마을을 거쳐 군부대가 있던 도래를 지나다 보니 ‘소설 <태백산맥> 무대 현부자 집’이라는 길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소설 속 현부자집이 실제로는 박씨 문중의 집이라고 한다.
“반원을 이루고 있는 대숲이 작고 낮은 한 채의 기와집을 보듬듯 하고 있었다. 그 기와집들은 현부자네 제각과 부속 별장이었다. 그 자리는 더 이를 데 없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풍수를 전혀 모르는 눈으로 보더라도 그 땅은 참으로 희한하게 생긴 터였다.”라고 썼던 바로 그곳이다.

포장이 잘 된 진입로는 소설 속 풍경을 떠올리는데 다소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소설에서 현실로, 과거에서 현재로 건너가는 장벽이라고 여기자. 대신 70-8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풍경에 묵직함을 더해준다. 조정래가 “스스로 기구함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사꾸라”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짐작하게 하는 그런 묵직함이다. 천하의 명당이라는 현부자집은 실로 그 위용이 대단하다. 조선식 마루, 일본식, 천장, 그리고 양변기를 갖춘 화장실의 조합이 그 위용을 재미있게 만들어 주는 면이 있다.

<태백산맥>에만 너무 취해있다가는 아쉬움을 크게 느낄 수도 있다. 나무가 사라져 다소 황량하게 느껴지는 진입로며, 조정래 문학관이 들어선 위치나 그 주변과 조화롭지 못한 어울림 등을 생각하면 천편일률적인 ‘관광도시’ 기획이 어떤 면에선 흠집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정래 문학관


조정래 문학관은 현부자집을 중심으로 우측에 서 있다. 우측으로는 잘 꾸며진 정원과 커피숍이 보인다.
현부자집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새로 건축된 조정래 문학관이 있고 좌측에는 잘 조성된 정원과 커피숍이 있다.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이라고 쓰인 현대식 건물이 낯설게 눈에 들어온다.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는 조정래의 친필이 마음을 다소 위로한다.
‘태백산맥 화이트하우스’ 앞 연못에 함초롬히 솟아오르는 연꽃의 아름다움이 매섭다. 찻집은 개인이 운영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현부자집 건물의 원소유자 가족이 운영한다고 했다.

그 다음으로 발길을 돌린 곳은 조정래가 어린 시절을 난 집이다.
옛 ‘벌교상고’인 ‘벌교제일고’의 멀지 않은 곳에 ‘조정래의 집’이 있다. 주소로 치자면, 회정리 539번지. 찾기가 수월하지 않다. 안내판이 없는 골목길인데다 현재 조정래와는 무관한 이가 그곳에 살고 있다.
벌교상고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조정래는 이곳에서 초등학교 4학년부터 광주서중 입학 전까지 살았다 했다. 원래는 초가 3칸이었는데 지붕을 바꾸고 4칸으로 고쳤단다. 나오면서 보니 터미널에서 순천 가는 길이다. 국민아파트와 국민슈퍼에서 길을 찾으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작가의 유년기를 짐작하는 것이 때로는 작가만의 고유한 세계를 엿보기라도 하는 듯 묘한 설렘을 안겨줄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헌데 그 설렘이 어쩐지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느낌이다. ‘예술가의 집’이 그저 방치되고 있는 것 같은 심정이랄까. 그런 심정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을 것 같다.

벌교 존재산에서 바라본 모습


다음 행로는 벌교읍. 벌교는 사실 일본사람들이 개발한 읍이라고 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낙안고을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는 갯가 빈촌에 불과하지만 일본인들이 전남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했다는 것이다. 지형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지만, 땅에 배어 있는 슬픔에 마음이 먼다.

벌교는 일본인들이 노릴만한 지정학적 특성을 잘 갖추고 있는 곳이다. 그것은 사람이 살만한 도시여건을 많이 갖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한적한 포구 벌교에 일본인들이 줄지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갯벌을 막아 제방을 쌓고 간척사업을 해서 경지를 만들고 벌교사람들을 소작인으로 삼아 착취한 미곡과 주변산지에서 베어낸 원목들을 일본으로 실어갔다고 했다. 지금도 그들이 남기고 간 자취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태백산맥>에서는 이곳을 이렇게 묘사한다. “벌교는 한 마디로 일인(日人)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 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 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는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벌교 포구의 끝 선수머리에서 배를 띄우면 순천만을 가로질러 여수까지는 반나절이면 족했고, 목포에서 부산에 이르는 긴 뱃길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벌교버스정류장 앞에는 삼거리가 있다. 동쪽은 순천에서 들어오는 곳이고 오른쪽으로 낙안과 광주 방면으로 가는 길, 그리고 왼쪽 길은 고흥과 목포 방면으로 가는 길이고 또한 벌교역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왼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50m도 채 못 가 다리가 나왔다. 철다리였다. 그 유명한 왕초 다툼이 전개되던 곳. 그러나 아직 기차가 지나가지 않았다. 해방과 함께 벌교로 돌아와 용맹스럽게 일본 놈을 처치한 후 일약 독립투사로 변신한 염상구. 그가 장터거리 주먹패의 주도권을 움켜쥐기 위해 땅벌이라는 깡패왕초의 제의로 희한한 결투를 벌이던 곳이 바로 이 철다리다. 철교의 중앙에 서서 기차가 가까이 올 때까지 누가 더 오래 버티다가 바다로 뛰어내리는지 담력을 겨루어 지는 사람은 영원히 벌교바닥을 뜨기로 한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이다.

벌교 앞바다


조정래는 “철교의 교각은 모두 아홉 개였는데, 그들은 중앙 교각 위에 서 있었다. 기차가 ‘뙈액∼’ 기적을 울리며 검은 괴물처럼 철교로 진입했다”고 썼다. 벌교의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각 지형지물마다 독특한 생명력을 불어넣었음을 알 수 있다. 철다리도 비록 쇠붙이지만 살아 움직이는 기차와 기적소리라고 하는 생명력 그리고 승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삶의 처절함을 깡패들의 격전을 통해 박진감 있게 묘사해 철다리에게도 호흡을 불어넣어 줬다. 주먹과 철다리 그리고 바다. 이 얼마나 교묘한 설정인가.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어느 누구도 그 생명력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훌륭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역사의 현장을 안내하는 표시판 하나 없이 잠재워버렸고 철다리 또한 예외 없이 죽은 듯 그대로 누워있다. 가슴 아픈 역사라 잊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60년 전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누군가 치유해주길 바라며 그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철다리를 건널 수 있게 철로 옆으로 인도가 만들어져 있었다. 다리를 건너니 농도 옅은 갯내가 코끝에 다가온다. 이곳이 그 유명한 벌교포구다. 1910년 당시에는 벌교천 동안(東岸)에 작은 포구였던 벌교포구를 일제가 식민지개발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으로 통하는 수륙의 교통요지로 개발했던 곳이다. 당시에는 대형화물선과 범선들이 드나들었고 경상도를 연결하는 철도와 국도가 개설돼 광주로 통하는 구암선, 고흥으로 연결된 도로들을 이용해 수탈의 집결지로 이용했던 곳이다. 다리 아래에는 썰물이라 그런지 몇 척의 소형어선들이 옛 영광의 그림자인양 쓸쓸하게 메어져 있다. 대형화물선이나 범선이 들어올 만한 포구의 위상이 없어진 지 이미 오래인 듯 물빛마저 숨 죽어 있다.

갈대밭 끝자락까지 빠져버린 바닷물은 검 짙은 갯벌의 속살을 드러내놓고 간간이 먹이를 찾아 나선 이름 모를 새들의 멱 감는 소리에 놀라 무의미하게 출렁이고 있을 뿐이다. 갈대밭이라면 순천만 갈대가 단연 일품이다. 갈대숲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생태계의 무리들로 보면 벌교펄 갈대밭은 별식(別食)같은 것이다.

벌교 초등학교


갯물과 밀물이 어우러지는 벌교포구에 반쯤 몸을 담그고 잿빛의 벌 속에서 사람의 눈으로는 결코 분간할 수 없는 고운 녹색성분만을 뽑아 하늘로 뿜어내는 갈대들의 생리현상으로 벌교갯벌은 갈대들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갈대는 그 매서운 엄동설한에도 결코 콧날을 꺾이지 않은 채 기다란 생명의 끈을 뭍에다 적시고 조급해하지 않고 봄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 갈대가 벌교에 있다. 벌교갈대는 해사한 낮 빛으로 누구와 부딪치든 가볍게 손을 흔든다. 바람이 불어 요란스러울 땐 수선을 피워 꺾일 듯 부러질 듯 낭창거려 약하고 순해 보이지만 그건 제스처 일 뿐 아래에는 모질고 강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갈대와 벌교는 많이 닮았다고들 한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장터가 이어진다. 1930년대만 해도 1,180호가 넘는 상가건물들이 즐비했고 주물, 제화, 기와, 조면 공장 등 21개나 되는 공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전남 3대 시장의 하나로 명성을 떨쳤다는 곳, 2만여 명의 장사꾼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루던 곳, 바로 그 벌교장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5일마다 열리는 벌교장날이다. 장터는 지금도 옛날의 영화를 이어가기라도 하려는 듯 장사꾼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농번기라 절반도 안 나왔다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 곳 장터에 있다.

워크홀릭 담당기자 장치선 charity1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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