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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를움직이는사람들>40.조선맥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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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맥주 싸움은 퀄리티(품질)전쟁이다.” 지난달초 열린 정기이사회에서 박경복(朴敬福.74)조선맥주회장은 이같은 말을 시작으로 예의.1시간 훈시'의 포문을 열었다.
매달 한번 열리는 이사회는 통상 1시간 정도의 朴회장 연설로시작된다.고희(古稀)를 넘긴 나이답지 않게 정정한 그는 이날도“상표는 얼굴이다.인쇄를 바르게 하라.맥주를 담는 병도 디자인에서부터 청결도에 이르기까지 최고로 만들어야 소 비자들이 믿고찾는다”며 임원들을 독려했다.
***맥주를 分身처럼 생각 그는 매일 오전7시 영등포공장에 출근하면 곧바로 운동화로 갈아신고 조깅을 겸해 맥주라인을 돈다.맥주를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朴회장은 해외출장 때를 빼고는 1주일에 한번씩 전주와 마산에있는 지방공장을 번갈아 순시하는 것을 거르는 법이 없다.발로 뛰는 현장경영자인 것이다..한우물을 파려면 철저히 파야한다'는것이 그의 신조다.
일본 오사카(大阪)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朴회장은 공장을 짓거나 증설할 때 설계도면을 일일이 체크하며 생산설비를 고르는 일도 직접 한다.
朴회장의 첫 사업은 맥주가 아니었다.20대 초반 일본에서 돌아온 그가 맨 처음 손댄 것은 목재업.
부산에서 내로라하는 거부(巨富)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렵지않게 사업자금을 동원해.삼강목재'를 차려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고 창업 5년만에 상당한 재력을 쌓았다.
근검정신이 몸에 밴 朴회장은 임직원들과 식사하다 음식을 남기는 것을 보면 호통을 친다..작은 것을 아껴야 큰 것을 절약할수 있다'고 강조한다.그가 우리나라 맥주회사 1호인 조선맥주의경영권을 쥔 것은 69년.33년 일본인 손으로 창립된 조선맥주(당시 상표명 삿뽀로)는 해방후 잠시 미군의 관리로 넘어갔다가66년 朴회장의 실제(實弟)인 경규(敬圭.68년 작고)씨가 경영권을 인수했다.
그러나 동생이 급환으로 타계하자 朴회장이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당시 조선맥주는 경영주의 잦은 이동과 경쟁사인 동양맥주의 약진으로 상당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朴회장은 그때“회사를 살리려면 나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며 즐기던 골프를 끊었다..골프장 절연(絶緣)'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 부산CC 주최의 첫 골프대회에서 우승할 정도의 골프실력이었지만 30년 가깝게 골프채를 놓고 있다.
朴회장이 가장 싫어하는 이야기는 .하이트 돌풍'이라는 표현이다. .만년 2위'라는 설움을 받으며 밟혀도 다시 일어나는.잡초'처럼 일하다보니.하이트'란 효자맥주가 탄생한 것이지 갑자기찾아온 행운이 아니란 것이다.
실제로 하이트의 대약진은 벼랑에서 일군 작품이었다.91년 소주 1위 업체인 진로가 맥주사업에 뛰어들 채비를 갖추고 페놀사건으로 주춤했던 경쟁업체인 동양맥주의 시장점유율이 다시 상승커브를 그렸다.
게다가 조선맥주가 야심작으로 내놓은.마일드'도 기대밖의 결과를 낳아 30년이상 유지해온 맥주시장의 점유율 30%도 지키기어렵다는 비관론이 사내에 팽배했다.
이때 朴회장은 히트제품 개발없이는 안되겠다는 위기감 속에 차남인 박문덕(朴文德.46)사장과 외조카인 김명현(金明賢.56)부사장을 불러 비상탈출구를 모색하게 된다..트로이카 경영'이 닻을 올린 것이다.
***생산.개발.자금 3박자 朴회장은 생산,朴사장은 신제품개발과 자금지원,金부사장은 판매총괄등으로 역할을 분담해 배수의 진을 쳤다.
91년3월 朴회장의 장남인 박문효(朴文孝.동서유리회장)씨에 이어 사장자리에 오른 차남 문덕씨가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이 회사안에 마케팅부서를 신설한 것.
그동안 30%의 시장점유율에 안주한 기존의 판촉기법에서 벗어나 공격적인 시장접근을 시도한 것이었다.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인 그는 졸업 직후 바로 입사했다.서울지점등 영업일선에서만 경영수업을 쌓은 그는 자사 영업의 취약점을잘 간파하고 있었고 사장자리에 오르자 자신이 평소 구상하던 영업전략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때 마케팅팀의“국민들이 깨끗한 물에 대한 욕구가 강한 점에착안해 암반 천연수로 맥주를 만들자”는 건의를 朴사장은 즉각 받아들였다.
물론 사내에서 반대도 적지 않았지만“모든 것은 내가 책임진다”며 출사표를 던졌고 지금도 광고계에서 회자되는 대대적인.광고폭격전'을 전개했다.
연간 5백억원에 가까운 폭탄(광고판촉비)을 대느라 때론 朴회장에게.사후 결재'를 받는등 당시 朴사장의 마음고생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朴사장은 취임하자마자.티없는 경영'을 주장했다.신상필벌(信賞必罰)을 원칙으로 능력 위주의 인사를 하겠다는 것이다.실적이 있는 자리에 승진인사가 있다는 원칙을 세워 영업일선을 독려했고그같은 방침은 최근들어 더욱 강화되고 있다.지난 해 12월엔 마케팅 부서 7명을 전원 한계급씩 특진시키는 파격인사도 그같은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전국 28개 지점장이 모여 한달에 한번 열리는 지점장회의를 이사회와 버금가는 비중있는 회의로 끌어올린 것도 그였다.
맥주와 양주의 영업현장을 사실상 감독.지휘하는 것은 金부사장(부산.영남지역 영업총괄)의 몫이다.
金부사장은 맥주업계에선 알아주는 판매의 귀재.조선맥주가 동양맥주의 위세에 눌려 있을 때도 자신이 관할하는 영남지역에서 만큼은 동양과의 판매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그가 하이트작전의 현장영업 사령탑으로 상경할 때는 주류업계가 바짝 긴 장했다고 한다. 朴사장이 대학후배이자 사촌동생이지만 공식석상에서는 깍듯이예우한다.
***건설.유통업등 진출야망 박문효 동서유리회장은 91년 사장자리를 동생에게 넘긴뒤 조선맥주의 경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지분도 朴사장보다 적다.
조선맥주의 차세대경영진 후보군 중에는 영업본부장을 맡고 있는황도환(黃道煥.47)전무를 꼽을수 있다.
서울대 문리대를 나온 그는 경리.영업분야는 물론 공장장까지 지내는등 생산과 경영 전반을 두루 경험했다.대인관계도 원만해 회사의 대외업무에도 폭넓게 간여한다.
조선맥주의 최근 내부자료인.2005년 비전'은 종합주류회사의기반을 다진 후 건설,호텔.콘도사업,생수등 식음료,유통업과 운송사업,포장기계및 인쇄등 6대 사업군으로 넓힌다는 전략이다.
조선맥주는 홍천공장이 내년 상반기 준공되면 우리나라의 첫 맥주공장인 영등포공장은 문을 닫고 그 자리에 본사빌딩과 유통센터등을 지어 제2의 창업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하이트의 선풍이 탈(脫)주류업체로의 재도약으로 연결되기 위해선 60여년동안 유지해온 주류회사 특유의 보수적인 사풍을 깨는 새로운 기업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다음은 새한그룹편><고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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