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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꿈 거의 이뤄…더 이상 역할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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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지난 11일 경춘선 상행열차 객실. 벽안의 외국인이 한국풍경을 하나라도 더 눈에 담아두려는 듯 창 밖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오는 11월 38년간의 한국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떠나는 원한광(미국명 호러스 호튼 언더우드.61) 박사다.

"외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인생을 정리하고자 할 때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元박사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미국행의 이유를 밝혔다. 그는 3년 전부터 환갑이 되면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해 왔으며 한국에서 입양한 두 딸과 친아들 형제 등 슬하에 2남2녀를 두고 있다. 자식들은 현재 미국 플로리다에서 살고 있다.

"지난 19세기 증조할아버지(원두우)가 한국에 오면서 꿈꿨던 일이 거의 다 이뤄졌다. 한국에서 언더우드 가문의 역할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또 "오는 12월 초 둘째아들 데이비드가 첫 애를 낳는데, 할아버지가 첫 손자를 보는 순간을 함께해 줘야 하지 않겠나"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元박사는 세살 때인 1946년 아버지(원일한) 손에 이끌려 한국에 왔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기독교 박해 정책으로 강제추방당한 뒤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이다. 그는 60년 미국에서 공부하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 그 뒤 중간에 2년간의 연세대 교수 생활을 제외하고는 76년까지 미국에 계속 머물렀다. "나 스스로 한국에서 언더우드 가문의 뒤를 이어 봉사할 자신이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야 한국에 정착했었다"고 뒤늦게 한국에 돌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자식들 가운데 연세대 교수를 한명 정도 배출해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가려고 했는데 뜻대로 안 됐다"고 아쉬워했다.

이철재 기자

언더우드家의 역사 근현대사 고스란히 담겨

언더우드가의 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축약본이다. 1세 원두우는 1885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그는 광혜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으로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와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기독교청년회(YMCA) 조직에 앞장섰다.

서울에서 태어난 2세 원한경 박사는 일제하 암흑기에 제암리 학살사건을 외국에 폭로한 지사(志士)였으며 '한국의 근대교육' 등을 통해 한국학 연구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의 부인 에델 반 와그너는 해방 후 격변기에 좌익 청년의 흉탄에 맞아 숨지기도 했다. 3세 원일한 박사는 한국전이 발발하자 미 해군에 자원 입대해 1953년 휴전이 되기까지 판문점 회담에서 통역팀을 주도했다. 71년부터 연세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해온 4세 원한광 박사는 풀브라이트 장학프로그램과 미국유학시험을 주관하는 한.미교육위원단 단장과 연세대 재단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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