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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에밀레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왜소케 하리니,그건 나 또한 인류의 일부이기에.그러니 묻지를 말지어다,누구를 위해 종(鐘)은 울리느냐고.종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 17세기 영국시인 존 던의.기도문'가운데 나오는 대목이다.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이 글속의.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를 제목으로 인용한 걸작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존 던 자신이.형이상학적 시인'으로불리듯 이 글속의.종'은 매우 심오한 뜻을 지니고 있지만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소리에 의한 삶의 깨달음'이다.곧 종교철학적관점에서 종의 존재가치와 맥이 닿아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종교는 종과 그 소리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해 왔다.가령 로마 가톨릭교나 영국국교는 종이 바람이나 일광의 해를 입지 않게 하고,공기를 맑게 하며,종에 새긴십자가의 힘에 의해 악령(惡靈)을 물리칠 수 있 게 해준다고 믿었다.중국에서도 사심(邪心)을 쫓고 악령을 물리치기 위해,혹은 풍년을 기원할 때마다 종을 울렸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종은 불교의 상징물인 범종(梵鐘)으로 대표된다..백팔번뇌(百八煩惱)'를 없애고 깨달음의 지혜를 성취한다는 이상과 기원이 하나하나의 범종속에 간절히 담겨 있다.특히.소리'에각별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게 우리나라 범종의 특징이기도 하다.에밀레종이라 불리기도 하는 신라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의 종명(鐘銘) 머리글을 보면“참된 삶의 길이나 부처의 웅장한소리는 지극히 높고 깊어 깨달을 수도,들을 수도 없지만 종소리를 통해 그것을 깨달을 수도,들을 수도 있다”고 적혀있다.
비록 설화로 전해 내려오는 것일 따름이지만 그 종을 만든 일전(一典)이라는 사람이.좋은 소리'를 찾지 못해 고심하던 끝에어떤 중의 권고로 한 여자의 무남독녀를 쇳물의 가마속에 넣고 나서야 성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그 소리의 훌륭함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에밀레종의 타종이 어려울 것 같다”는 포항공대부설 산업과학기술연구소의 진단은 우리를 크게 실망시킨다.만약 관리부실탓이라면 그냥 넘겨버릴 일이 아니다.소리를 내지 못하는 종,울리지 않는 종이라면 그 가치는 반감될 수밖에 없 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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