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윤정의 영화 VS 영화] '효자동 이발사' VS '포레스트 검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21면

'효자동 이발사'를 보며 '포레스트 검프'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우선 정직과 성실함 자체인 주인공의 모습이 그렇다. 아이큐 75의 포레스트 검프와, 정치적인 아이큐 숫자는 그와 비슷할 이발사 성한모는 둘다 어느 시대에 살든간에 '냉소'라는 꺼풀을 걷어내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각각 '쇠다리'와 '깍쇠'라는 별명으로 놀림받는 이들은 일견 어수룩해 보이는 캐릭터다.

그러나 두 영화 모두 정신박약자나 이발사의 가슴뭉클한 휴먼드라마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그들의 눈을 프리즘으로 해서 1960년대와 70년대라는 격동의 시대를 돌아다 본다. 두 사람 모두 5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진입 시기까지를 이야기한다. 연대로 따지면 이발사 성한모가 박정희 대통령을 따라 미국에 가서 만났던 닉슨 대통령이 같은날 세계 탁구선수권대회 챔피언이 된 검프를 백악관 다른 방에서 접견했을지 모르는 일이며, 베트남전에 참가한 이발사 조수 진기에게 험한 욕을 해대던 미군 병사는 나중에 총격전에서 검프에게 업혀나오던 바로 그 일지도 모른다. 진기라는 청년을 베트남전에 자원 입대하게 만든 건 늘 흉내내던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미국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고, 그 엘비스 프레슬리의 세계적 광풍은 검프가 TV를 보며 성치도 않은 다리를 흔들며 흉내내던 그때 시작됐다.

주인공역을 맡은 두 배우 모두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없는 훌륭한 연기를 펼친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웃음과 슬픔의 절묘한 밸런스로 시끌벅적한 웃음 속에 조용한 감동 하나를 던져주는 그들의 연기는 모자라는 검프를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로, 무식한 성한모를 미워할 수 없는 그 시대 아버지의 자화상으로 끌어올린다. "달려, 포레스트 달려"라는 말만 들으면 달리는 포레스트는 베트남의 무공훈장과, 세계탁구 챔피언과 새우잡이 어선선장과 애플 컴퓨터의 최대지분 소유자를 거쳐 결국엔 사랑까지 얻으며 불가능을 모르는 미국인의 표상을 웅변한다.

성한모도 달린다. 그러나 성한모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다. 청와대 근처인 효자동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맹목적인 충성을 다 바치는 그가 대통령의 머리를 깎는 충성으로도 모자라, 설사병에 걸린 아들을 자진 신고하는 충성심을 보여준 대가로 전기고문에 시달린 뒤 걷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 달리는 것이다. 그의 내달음 속에는, 역사는 나의 가슴을 밟고 지나가며 문드러지게 만드는데도 끽 소리 한번 못하고, 조용히 자신의 몸 하나 부서져라 달릴 수 밖에 없는 우리 부모님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두 영화가 갈라서는 지점은 지나간 시대를 바라보는 입장의 차이일 것이다. 94년께엔 미국이 포레스트 검프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논쟁을 마감한 뒤 보수주의의 안락함 속에 빠져있을 때다. 영화는 포레스트 검프라는 관광가이드를 내세워 특수효과로 장식된 미국 역사 테마파크를 돌아보는 식이다. 닉슨.케네디.존 레넌.반전 시위.히피들의 평화행진 등 역사적 이정표들은 당시의 히트곡들과 함께 역사 버라이어티 쇼의 배경이 될 뿐이다. 딱 그 정도의 진지함으로 역사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일관성이 있다. 영화 속에서 반문화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제니가 마약으로 찌든 뒤 검프가 그의 딸을 키운다는 결론 역시 당시의 반전 문화를 투항시킨 보수적 주류들의 우월감을 드러낸다. 포기하지 않는 평범한 미국 사람이라면 엄청난 행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이 영화의 낙관주의는, 그래서 그 결론에 동의하는 중산층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효자동 이발사'의 시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아직도 논쟁 중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자꾸만 그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의 단단함에서 망설이고 머뭇거린다. 아무리 가상의 인물과 유머를 앞세웠다고는 하지만 영화의 전반부에서 관객은 그 시대를 똑바로 바라보고 발언하려는 영화의 진지함에 마음의 옷깃을 단단히 여몄을 것이다. 별명처럼 스스로를 '두부 한 모' 정도로 생각했던 이발사 성한모가 서서히 역사의 피해자가 되는 과정은, 국민교육헌장 외우느라 밤새우고 '유신'이라는 뜻도 잘모를 단어를 생활의 신조로 삼았던 사람이라면 남 일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껏 영화의 진지함과 비극이 정점에 달할 때쯤 영화는 갑자기 꼬리를 슥 내리며 "이건 진심이 아닐지도 몰라"라며 발뺌한다.

아들의 전기고문 장면에서 갑자기 팬터지의 톤으로 확 튀어버리는 데선 배신감 같은 게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사랑하는 아들을 바보로 만든 나라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를 들쳐 업고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성한모가 그동안의 충성심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쳐버리지 않을까 걱정할 때쯤해선 다시 아들의 병을 낫게 하고 희망은 아직 있다고 이야기한다. 영화는 아예 환상의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한편의 우화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정반대로 역사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 한 인간에 대한 비극을 정색하고 다룬 리얼리티 드라마가 될 수도 있었다. 어느 쪽으로나 훨씬 더 집중도 있는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기고문의 '팬터지'와 심수봉의 노래 '그때 그사람'이 주는 리얼리티 속에서 방황하는 영화를 우리는 결코 미워할 수만은 없다. 한편에선 청산될 역사의 대상으로, 한편에선 아련한 향수와 보수의 마지막 근거지로 영화 속 인물을 바라보는 이 시대에, 흔들거리는 영화의 관점은 아직 결론나지 않은 그 시대에 대한, 지금 우리 시선의 수준과 닮아 있다 할 것이다. 스스로가 역사의 승리자인지 패배자인지 헷갈리는 우리는, '포레스트 검프'의 확신에 가득차 안정감 있는 영화를 보고 난 뒤엔 그 영화의 결론에 입을 삐죽거릴 수밖에 없지만 '효자동'의 뒤뚱거리는 불확신엔 오히려 애정어린 미소를 던지게 되는 것이다.

이윤정 영화칼럼니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