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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삐 풀린 자본주의 … 반작용 있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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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테오 좀머 박사가 부산 해운대 웨스틴 조선 호텔에서 김영희 대기자와 테오 좀머 박사가 부산 해운대 웨스틴 조선 호텔에서 김영희 대기자와테오 좀머 박사가 부산 해운대 웨스틴 조선 호텔에서 김영희 대기자와테오 좀머 박사가 부산 해운대 웨스틴 조선 호텔에서 김영희 대기자와 대담하고 있다[부산=송봉근기자]

 테오 좀머 박사는 유럽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언론인이다. 독일 튀빙겐 대학과 미국의 시카고 대학, 하버드 대학에서 역사와 정치학을 전공한 그의 세계 정세에 관한 통찰력은 깊고 넓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지난 23일 해운대에서 한·독 친선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 정부로부터 수교훈장을 받고 연설하면서 금융위기 이후의 세계 경제·정치·도덕적 질서에 대해 언급했다. 해운대의 웨스틴 조선 호텔에서 그와 일문일답을 가졌다.

 김영희=역설적입니다만 미국과 유럽 선진국들이 국가개입 정책으로 시장경제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올인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금융위기로 정치적인 이득을 보는 것은 유럽과 미국의 보수적인 정권들입니까, 아니면 노동당을 포함한 사회민주주의 정권들입니까.

좀머=보수적인 정부든, 사회주의 정부든 위기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점은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 정권들, 중도우파 정권들이 점수를 딸 것으로 봐요. 시장경제 원리주의의 결함을 지적하고 그 결함을 시정한 공로가 그들에게 있어요. 그런 점에서 내년 독일 총선거가 주목되는데 아직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어요.

김=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동장한 브레턴우즈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세계 금융질서의 등장은 불가피합니까.

좀머=그렇습니다. 중국·인도·한국·브라질 같은 나라들이 세계 금융질서의 새로운 주역(actors)으로 등장한 현실을 반영하는 새 체제가 필연적으로 등장할 걸로 봐요.

김=경제의 글로벌화에 대한 역풍(backlash)은 없을까요.

좀머=글로벌화는 이제 뒤집을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보다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 비이성적인 흥청망청, 규제받지 않은 세계 금융체제에 대한 반작용은 있을 겁니다.

김=유럽연합(EU)의 단일통화인 유로가 이번 위기에 신통력을 발휘하지 못합니까.

좀머=유로가 없었다면 이번 금융위기가 유럽공동체 회원국들에 개별적으로 주는 타격은 훨씬 컸을 거예요. 독일의 마르크화도 위기극복에 큰 힘을 쓰지 못했을 겁니다.

김=독일은 왜 위기 해결을 위한 구제기금을 만들자는 프랑스 제의를 거절했습니까.

좀머=그건 구제기금의 관리 주체와 할당 기준에 관한 합의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독일과 프랑스의 의견이 대립된 건 불과 며칠뿐이었어요. EU 회원국들이 공동으로 결정된 틀 안에서 각자 개별적으로 필요한 조치를 취하자는 좋은 해결책에 합의했어요.

김=슈타인브뤼크 독일 재무장관은 국제금융의 세계에서 미국의 수퍼파워 지위가 끝난다고 예언했는데요.

좀머=한 가지 실마리는 있어요. 그는 전 총리 헬무트 슈미트와 자주 만나는데 슈미트는 20년, 30년 내내 달러와 유로와 중국의 인민폐가 정립(鼎立)하는 금융체제가 올 것이라고 주장해 왔어요.

김=금융위기가 미국의 정치적인 지위 약화를 가져옵니까.

좀머=미국의 지도적인 역할엔 변화가 없을 겁니다. 다만 다른 나라들의 입김이 강화될 것은 확실하다고 봐요.

김=국가의 역할에 대한 인식도 달라질까요.

좀머=경제, 특히 금융의 세계에서는 투자에 대한 이윤이 평가의 기준이었는데 앞으로 정치의 세계에서는 이윤 아닌 다른 가치, 고전적인 미덕과 가치를 새로이 존중하고 실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무시당하고 조롱당한 국가가 복귀하여 룰을 정하는 겁니다. 금융인들이 현명하다면 국가가 정하는 룰을 지킬 겁니다.

김=훈장 받고 연설하면서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를 인용해 새로운 도적적 세계질서를 언급했는데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좀머=칸트는 인류는 근본적으로 변화·발전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현실주의자 칸트는 인류는 성실과 정직(probity)이라는 목표를 향해서가 아니라 저급한 본능에 대항해 영원한 투쟁을 하는 거라고 했죠. 칸트의 생각이 옳다면 새로운 도덕적 세계질서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죠. 그러나 우리는 EU가 개인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 개인이 공동체의 희생 위에 자신의 야망을 실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손인 동시에 세계화의 희생자들에 대한 눈에 보이는 가슴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실은행 구제에 들어가는 수조 달러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도 안 되는 예산으로 세계화의 희생자들을 교육하고 최저임금제를 실시하는 정도의 도덕성(morality)이 절실해요.

김=칸트가 살아있어서 신문에 칼럼을 쓴다면 한국·독일·유럽·미국 지도자들에게 어떤 충고를 할까요.

좀머=그는 750자의 짧은 글을 못 쓸걸요(웃음). 그는 아마도 유명한 단언적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라는 일반적인 명제를 금융위기라는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하라고 할 겁니다. 단언적 명령이란 내 욕망이나 필요와 관계없이 내가 해야 하는 것, 내 행위의 결과가 남들도 그렇게 하는 일반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 것,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죠.

김=미국 대선에서 오바마가 당선되면 금융위기가 남긴 벅찬 과제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좀머=그가 떠안을 유산은 정말 무거워요. 그가 경험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틀린 건 아니지만 케네디도 당선됐을 때는 내세울 만한 경험이 없었어요. 중요한 건 세계를 정확하게 보고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분석력과 안목입니다. 매케인 후보도 강점을 가졌지만 오바마가 훨씬 좋은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해요.

김=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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