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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프리즘>연극배우 양금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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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은행잎이 무리져 시나브로 내려앉는 늦가을 오후 서소문의 작은공원.일산행 기차가 지나간 철길 옆에 그가 섰다.진한 갈색 가죽 상의,가슴에 검정 장미꽃을 꽂은 그에게서 한줄기 커피향이 묻어나왔다.
연극배우 양금석(梁金錫.35).요즘 KBS 아침드라마 『유혹』에서 일에 지치고 사랑에 허기진 남편(강석우)을 못살게 구는여자.그래서 아침마다 주부들의 욕을 사서 먹는 버릇없는 「부잣집 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유혹』에서는 영 「엉망」이지만 드라마속에서 뚜렷한 자기주장으로 남자를 리드하는 매력적인 커리어우먼과 밭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된장국을 끓이는 순종적인 촌부를 오가는 그의 두 얼굴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그속에 숨어있는 또다른 그를 만났다.양금석의 연기는 고교 시절 한 무대에서의 전율스런 체험에 물길을대고 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내게 이런 힘이 있었다니.수많은 밤을 연습으로 지새웠어도 표현할 수 없었던 바로 그것.갑자기 알수 없는 어떤 힘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그리고 나는 내가 아닌충신(忠臣) 성충이 됐다.방탕한 의자왕에게 죽 음을 각오하고 간하던 성충의 마음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내성적인 연극반 여고생 양금석이 청소년연극제에서 최우수연기상을 탄 것은뜻밖이었다.대사도 많지 않았던 조역에 불과했던 그가,그것도 두번째 무대에서 덜컥 큰 상을 받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심 당연하다고 여겼다.『난 하면 할 수있어.그것도 아주 잘.난 나를 믿으니까』라는 평소 생각이 비로소 결실을 보인 것뿐이었다.이런 「당돌한 배짱」은 대체 어디서비롯되는 것일까.
『어릴적에 저희 집에 모이신 동네 어른들이 제게 춤을 춰보라고 했대요.그러면 저는 등잔불 아래서 할머니의 흰 치맛자락을 휘어감고 두둥실 손사위를 해가며 춤을 추었다죠.어디서 본 적도,배운 적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럴수 있었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린 마음에도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제 운명같은 거라는생각은 들었던 것 같아요.』 시청자들에게는 멀쩡한 가정을 파탄내는 자신만만한 패션디자이너 이명희(SBS『결혼』)로,더 이전에는 미친 무당 명화(SBS『분례기』)로 깊은 인상을 심어왔지만 역시 그에게는 TV 카메라보다 탁 트인 무대가 더 잘 어울린다. 『뮤지컬에서는 나를 마음껏 발산하는 쾌감을,정극에서는 나에게 집중하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낄수 있어 좋다』는 것이 그의 무대 예찬론.약간 쇳소리가 섞인 내밀한 듯하면서도 똑 떨어지는 말투,살아있는 눈빛,당찬 몸짓은 그를 항상 무대 중앙으로이끌었고 사람들에게 정열과 광기와 퇴폐와 허무를 동시에 표출해내는 여인으로 각인됐다.요조숙녀에서 방탕함까지 여자의 모든 속성을 가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시는 그가 특히 아끼는 배역.
그는 무대에 오르기 전 자신에게 매번 주문한다.오늘은 어제와다르고 내일은 오늘보다 새롭게.타성에 젖어 무대에 서는 것같은고통은 없다.늘 오늘이 첫 공연이다.무대 위의 나는 또다른 나.그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양금석은 민요나 국악같은 우리 가락을 참 좋아한다.『한오백년』이나 『회심곡』을 들을 때면 어느새 눈물이 솟는단다.어릴적 할머니 무릎을 베고 들었던 옛 노래가 아득히 들려오기 때문이다.초등학교시절 동네 무용학원에서 꼭두각시춤을 배우 게 해달라고그렇게 졸랐을때 어머니가 그 소원을 들어주었더라면 지금은 전혀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이기적이고 못된 커리어우먼이나 억센 여성상 말고 이젠아주 편안하고 착한 시골아낙 같은 역을 맡고 싶어요.얼마전 끝난 드라마 「애인」같은 작품도 정말 욕심이 가는 작품이에요.제가 여경을 맡았더라면 또다른 모습을 보실 수 있 었을텐테….』시립가무단 출신으로 한살 많은 남편의 조언은 언제나 그렇듯 날카롭다.연극 연출을 꿈꾸며 함께 유학을 준비했던 만큼 연극에 대한 애정도 누구 못지 않다.그래서 오전5시에 나가기도 하고 오전5시에 들어오기도 하는 아내를,연극을 끝낸 허전함을 달래기위해 한잔 술에 취하고 한병에도 안 취하는 후배를 넉넉히 안아주는 넓은 가슴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그의 또다른 일부분이다.매번 다른 사람의 삶을 살며 「또다른 나」를 발견해내는 은밀한 기쁨을 느낀다는 양금석.그가 진정 「나속의 나」를 찾는 날은 언제일까.

<정형모 기자> ▶61년 충남 아산,2남4녀중 셋째▶81년 신광여고졸▶81년 현대극단 입단,그해 뮤지컬 『에비타』로 데뷔▶89년 『칠산리』로 서울연극제 신인상▶대표작 연극:『까치교의우화』(83)『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84)『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89)『느릅나무 그늘의 욕망』(90)『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93)『올리버』(96),드라마:『미늘』(91)『분례기』(91)『결혼』(93),영화:『한줌의 시간속으로』(91)『네온속으로 노을지다』(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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