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셋’ 이혜훈은 왜 여성 대통령을 지지하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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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호 10면

한나라당 이혜훈(44) 의원은 싱글맘의 서러움을 잘 안다. ‘생과부 3년’을 겪어 봤기 때문이다. 1993년 UCLA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딴 뒤 남편(김영세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은 영국 케임브리지대, 이 의원은 미국 랜드연구소로 직장을 정했다. 두 돌도 안 된 큰아들, 백일이 갓 지난 작은아들을 데리고 이 의원은 LA에 남았다.

“고생해서 박사 따고 얻은 좋은 직장을 포기할 수 없었어요.”

전치 태반으로 두 달간 꼼짝 못하고 누워있으면서도 침대 머리맡에 컴퓨터 모니터를 두고 고개를 젖혀 가며 쓴 박사논문이었다.

94년 봄 이 의원은 머리맡 모니터가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지진이었다. “잠이 덜 깬 첫째는 억지로 걷게 하고, 둘째는 수건으로 들쳐 업고 피난을 갔어요.” 바로 옆 7층 건물이 폭삭 내려앉을 만큼 피해가 컸다. 여진 우려 때문에 사흘 동안 공동 세탁장에도 못 갔다.

남편이 있는 영국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코노미스트 채용 공고란의 첫 광고를 보고 무조건 원서를 넣었다. 그 해 10월 이 의원은 영국 레스터대 교수가 됐다. 하지만 생과부 생활은 끝나지 않았다. 그즈음 연세대에서 김 교수를 부른 것이다. 모교로 가겠다는 남편의 꿈을 막을 수도, 막 시작한 자신의 커리어를 접을 수도 없었다. “제가 한국 직장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라 쉽지 않았어요.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자리 잡을 때까지 2년이 걸렸죠.”

비가 잦은 영국 날씨 탓에 세 모자는 감기를 달고 살았다. 영국 어린이집에서는 아이가 감기에 걸리면 집으로 돌려보낸다. 조퇴와 결근을 반복하며 아이들을 간호하고 밀린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96년 생과부 3년을 마치고 귀국해 KDI 연구위원이 됐다. 한국은 ‘일하는 엄마’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셋째를 가진 이 의원은 정장을 크게 맞춰 입고 부른 배를 감췄다. 97년 가을, 직장에서 도봉산에 단체산행을 갔다. 만삭인 이 의원도 등산복을 입고 집을 나섰는데 진통이 왔다. “응급실에서 셋째를 낳고 회사에 전화하니까 ‘애를 가졌었느냐’며 깜짝 놀라더라고요.” 출산휴가로 누워있으면서도 보고서를 작성해 팩스로 보내야 했다. “왜 육아나 출산을 죄지은 것처럼 쉬쉬해야 할까…. 지금도 일하면서 애 키우고 힘든 여성들 보면 눈물이 나요.”

귀국 후 여성경제학회에서 연락이 왔을 땐 “시부모님 모시고 직장에 육아까지 하느라 참석하기 힘들다”고 했었다. 출산휴가를 마치자마자 자기 발로 찾아가 “뼛속 깊이” 지지자가 됐다고 한다.

아들만 셋인 이 의원은 “여성 대통령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지난해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그는 박근혜 캠프에서 활약했다. 원칙에 충실하고,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조율하는 여성 리더십. 생과부 3년에 등산복 출산을 겪으면서 키운 그 꿈을 그는 지금도 이루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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