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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역사] 61. 구름을 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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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필자가 쓴 대사를 좋아했던 탤런트 겸 배우 황정순씨.

내가 좋아하는 최상현이 작품을 부탁해 왔다. 그때 나는 50대 초반이었던가. 신문에 명보극장 사장이 의문사를 했다고 나왔다. 그것도 묘령의 여인과의 관계 때문이었다는 기사였다. 번쩍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갱년기 현상을 그려보자. 나도 그 나이에 이르렀다. 제목을 '고독한 길'이라고 해보았다. 공부도 별로 못하고 그럭저럭 살아온 한 사나이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은행 중역인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동창생을 부른다.

"나는 간다. 저 딸내미 때메 눈을 못 감겠다. 니가 좀 돌봐달라"간청하고 눈을 감았다. 은행 간부는 그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다 큰 아이들이 있고, 고질 때문에 일어나지도 못하는 아내가 있다.

아내는 발끈 화를 냈다. 황정순이다. 남편은 악역만 해오던 허장강. 죽은 친구의 딸은 최불암의 아내인 김민자. 황정순은 김민자를 심하게 다루었다.

그런데 이 계집애 행동이 이상하지 않은가. 청소도 깨끗이 해, 누워 있는 황정순의 손발이 되다시피 움직여, 그만 황정순이 홀딱 반해 김민자를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다 큰 자식 이순재.오현경이 김민자한테 관심을 갖는 것 같아 아파트 하나 빌려 내보내자고 한다. 남편이 그 말대로 했다. 이따금 들러 살펴준다는 것이 골프를 치고 와선 안마를 해주면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그래서 이상한 사이가 됐다. 아내 구실을 못하는 황정순의 은밀한 바람이었다. 그러나 심적 갈등을 일으켜 김민자를 결혼시켜 버렸다. 상대는 질이 나쁜 남자였다. 허장강과 김민자의 관계를 안 그는 산장에서 자고 있는 그들을 습격, 허장강이 칼에 찔려 죽는다. 김민자는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목숨은 잃지 않았다. 그녀의 소행을 신문하는 과정이 드라마의 전부다. 갱년기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는지가 나의 질문이었다. 주제가는 프랑스의 '메어 퀼 파'. 일곱가지 불가사의를 노래한 것이라던가.

허장강은 이미지를 바꾸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좋아했다. 더 좋아한 사람은 황정순이다. 내 손을 꼭 잡고 "선생님!"하고 외쳤다.

"어쩌면 대사가 그렇게 좋아요! 처음엔 왜 이런 아이를 데려 왔느냐고 원망하다가 차츰 아이의 행동이 하도 신기해 반신반의하며 끌어안는 과정, 기가 막히게 가슴에 와닿았어요. 좀처럼 잊지 못할 거예요!"

나도 아직까지 그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천하의 황정순이, 내 대사에 그렇게 반해 주었으니. 고맙지 않은가 그도 이제 늙었으리라. 우리는 피차 그런 짓하다가 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저러나 나한테 이 작품을 청탁해 이 여관 저 호텔 찾아다니며 간신히 원고를 받아가는 최상현의 환희에 찬 얼굴, 잊을 수 없다. 그도 이제 나이가 들었다.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이것을 TV드라마로 재생해봤으면 하는 욕망이 아직도 내게 있다. 웬만한 멜로물보다는 평가받을 것이다. 1971년이던가, 최상현은 '남과 북'을 TV드라마로 찍었다. 반응이 매우 좋았다고 했다. 그는 조용하고 진지하다. 그러나 동시에 냉철하다. 한국 TV드라마 성장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신으로 기록돼야 할 것이다.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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