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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별세한 구상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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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신수(身手)야 토종(土種)으론 멀쩡하다. 이목구비가 비교적 정돈되고 키도 알맞게 큰 편이어서, 소싯적엔 에헴! 미동(美童).미남(美男)이란 소리도 더러 들었다."(자전적 산문 '예술가의 삶' 중에서)

말년에 짤막한 턱수염을 트레이드 마크처럼 길렀던 고(故) 구상 시인(사진)은 적극적인 현실 참여와 특유의 친화력으로 문단 안팎에 드리운 영향력이 컸던 품 넓은 시인이었다.

5.16 직전에 쿠데타 모의가 발각돼 쫓기는 신세가 된 박정희 전 대통령을 한달여 숨겨준 게 계기가 돼 그와 친해진 사연은 유명하다. 자전 연작시인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에는 쿠데타 성공 사흘 뒤 朴전대통령이 그를 국제호텔로 불러 "어떤 분야라도 한몫 져 주셔야지!"라고 청하자 고인이 "나는 그냥 남산골 샌님으로 놔 두세요!"라고 고사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고인은 한국전쟁 등 역사의 격동기에 적극적으로 현실에 개입해 목소리를 높였다. 1959년 이승만 정권의 전횡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민권수호국민총연맹의 문화부장직을 맡았다가 옥고를 치른 게 대표적이다.

19년 서울 이화동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고인은 베네딕트 수도원의 교육사업 위촉을 받아 함경도 지구 선교를 맡게 된 아버지를 따라 네살 때 원산 인근 덕원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자랐다. 열다섯살에 수도원 부설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3년 만에 환속했고, 이후 공사판 인부, 야학당 선생 등을 전전하다 일본으로 밀항해 니혼(日本)대 종교과에 입학했다.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온 고인은 46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발간한 시집 '응향(凝香)'에 '여명도' '밤' '길'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시의 내용이 북한 당국에 반동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월남한다.

한국전쟁 종군 작가 부단장을 지낸 고인은 전쟁 체험을 다룬 연작시 '초토(焦土)의 시' 등 많은 연작시를 썼고, 시집 '구상' '말씀의 실상' 등을 남겼다. 연합신문 문화부장.영남일보 주필 등을 지냈고 효성여대.서울대 등에서 후학을 가르쳤으며 금성화랑무공훈장.국민훈장동백장.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고인의 문학세계는 '현란한 수식을 피하는 직접적인 시어로 역사적 현실과 종교적 구도의 경지를 추구한 것'으로 요약된다. 고은 시인은 "기교보다 표현의 직언성, 종교철학적인 주제가 두드러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고인의 개인사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젊어서 폐결핵을 앓았던 고인은 60년대 중반 폐 수술을 받아 한쪽 폐가 없이 살았다. 87년과 97년에는 두 아들을 차례로 잃는 슬픔을 당했다.

고인은 지난해 7월 월간 '문학사상'에 발표한 '저승의 문턱에서'라는 시에서 개인적인 아픔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나이도 80세 중반이나 되었고/젊어서 폐 수술을 두번이나 하여/호흡기능의 퇴화로 문 밖엘 못 나가고…'.

고인은 노환으로 투병 중이던 지난해 10월 장애인 문학 잡지인 계간 '솟대문학'에 2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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