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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간송 전형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930년대 일본 도쿄(東京)에서 변호사일을 했던 존 개스비라는 영국인이 있었다.그는 동양 고미술품 수집가로 뛰어난 고려청자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36년 2월26일 일본 청년장교 중심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개스비는 신변의 불안을 느껴 소장 미술품을 처분하고 귀국코자 했다.이 사실을 안 간송(澗松)전형필(全鎣弼)이 도쿄로 가 개스비와 만난다.50대의 개스비는 30대 간송의 문화재 열정과 고미술에 대한 높은 식견에 감복하고 소장품을 건네준다.이때 건네받은 미술 품중에 국보 65호인 청자기린형(麒麟形)향로와 국보 74호인 청자압형연적(鴨形硯滴)이포함된다.간송은 그 대가로 공주에 있던 5천석지기 전답을 팔아야 했다.
간송은 어째서 그많은 재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서화골동을 사들였을까.한가지 일에 지나치게 몰두해 수집을 할때 수집광 또는편집광이라 한다.심리학에선 이를 항문기(肛門期)적 장애라고 한다.항문이란 오무리는게 속성이다.유아기 아이들의 손은 언제나 무엇을 잡으려 든다.이런 속성이 수집벽으로 연결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간송은 그런 항문기적 수집가가 아니었다.휘문고에 다닐때만 해도 그는 야구선수였다.그림을 좋아해 몇점의 습작을 남겼지만 화가도 아니었다.그가 서화골동 수집에 나선 결정적 동기는서예가요 독립선언서 서명자였던 위창(葦滄) 오 세창(吳世昌)의권유 때문이었다.민족문화재의 수집과 보존이 곧 또다른 독립운동의 하나임을 깨우쳤다.
간송은 곧 한남서원이라는 서점을 통해 고서수집 창구로 삼고 일본인 골동상 신보를 내세워 전국의 서화골동을 수집토록 했다.
그는 단한번 값을 흥정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부르는 값에 그냥샀다.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귀중한 문화재에 값을 매길 수 없다는 평소 신념 탓이었다.그러나 간송의 훌륭함은 수집에만 있었던것이 아니다.보통의 수집가는 은밀히 물건을 모아 남이 볼까 쉬쉬하며 홀로 즐겼지만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박물관인 보화각을 세워 고미술품의 공유화를 시도 했다.
며칠전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조선백자가 세계 도자기 경매사상최고가인 63억원에 팔렸다.간송이 살아있다면 가슴아픈 일일 것이다.11월의 문화인물로 간송 전형필이 선정돼 지금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선 간송추모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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