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노벨 과학상을 받으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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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올해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었을 때, 오랜만에 만난 변호사 친구는 앉자마자 대뜸 “왜 우리나라는 노벨 과학상을 못 받는 거야”하고 물었다. 평소 과학에는 별 관심도 없던 친구지만 일본인 과학자 4명이 노벨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약간 배가 아픈 모양이었다. 하기야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일본인(일본계 미국인 포함)이 13명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가지고 어느 신문은 13:0 이라는 운동경기 스코어 같은 제목을 붙이기도 하였다.

일본과 한국 사이의 특수한 감정 때문에 이러한 스코어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 일반 국민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왜 축구나 야구에서는 일본을 꺾을 수 있는데, 과학에서만은 그것이 안 될까. 바둑에서도 종주국이라 자처하는 일본의 콧대를 눌렀고 여자골프에서는 상대도 되지 않는데, 유독 과학 분야에서 아직도 일본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그 친구의 질문에 나는 표준적인 대답을 했다. 첫째, 일본은 근대과학을 받아들인 역사가 우리와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1949년 유카와 교수가 처음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기초과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10명도 채 안돼 학사 학위만 있으면 대학교수가 될 정도였다. 이번 물리학상은 60년대에 이룩한 업적으로 수상하였으니, 대학의 연구가 시작된 지 20년이 채 안된 우리나라로서는 아직도 한참 기다려야 할 것이다. 둘째, 일본은 기초과학의 저변이 넓고 국가 지원도 전폭적이다.

지난 10여 년간의 불황 속에서도 기초과학 투자는 꾸준히 늘려 왔다. 돈이 되는 단기적 응용연구만 지원하는 우리나라의 열악한 기초과학 연구여건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친구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유카와 박사가 49년 노벨상을 받았다면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하였을 텐데, 그때의 연구여건은 지금 우리나라보다 훨씬 열악하였을 것이다. 박세리는 여건이 좋아 여자 골프계를 제패할 수 있었나? 결국 여건 타령은 핑계 아닌가”하고 역습하였다. 상당 부분 일리있게 들리고, 아마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 과학자들에게 묻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물론 하늘이 내린 천재라면 여건에 관계없이 뛰어난 업적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과학계가 아직까지 그런 천재를 배출해 국민의 염원에 보답하지 못한 것은 송구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과학은 골프나 바둑과 다른 면이 있다. 우선 현대 과학연구가 과거처럼 아이디어만 좋으면 종이와 연필만으로 해결되는 시대는 지났다. 올해 노벨 화학상을 받은 녹색형광단백질(GFP)의 아이디어를 처음 냈던 더글러스 프래셔라는 미국의 과학자가 연구자금 부족으로 중간에 연구를 포기하고 지금 자동차회사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다는 에피소드에서 보듯, 현대 과학연구에서 꾸준한 재정 지원은 필수적이다. 심지어 순수이론 연구를 하더라도 실험그룹과의 의견 교환을 위해 세계 방방곡곡을 찾아다녀야 한다. 또한 노벨 과학상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황무지에서 천재 한두 명을 배출하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우리나라의 기초과학 연구를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시켜 국가 미래를 위한 원천기술을 개발하고, 인류 지적 재산 형성에 기여해 문화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여야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목표를 위해서는 물론 과학자의 뼈를 깎는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정부를 비롯한 주위의 도움도 필수불가결하다. 다행히 이명박 정부는 앞으로 정부 연구개발비의 50%를 기초 원천기술에 투자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투자와 더불어 연구개발 투자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여태까지 정부는 선진국의 기술을 쫓아가는 추격형 연구개발 정책에 익숙해 있어, 얼마 전까지 만해도 기초연구 지원신청서에 ‘수입 대체효과’를 쓰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이처럼 당장의 경제효과를 바라는 정책으로는 획기적인 과학적 발견이나 원천기술의 발전을 이룰 수 없다. 또한 연구과제를 선정하고 지원하는 일을 공무원이 아니라 전문가인 과학자 손에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 남이 안 하는 독창적 연구의 가치를 판단하려면 전문적 식견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부가 연구자 친화적으로 꾸준한 지원을 한다면 머지않아 우리의 젊은 과학자들이 우리에게 노벨 과학상을 안겨주게 될 것이다.

오세정 서울대 자연대학장·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