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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 키우는 ‘아니면 말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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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오래전 당시 야당의 한 중진의원이 취중에 대통령의 사생활 비리와 관련해 엄청난 얘기를 했다. 술자리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생생해 이튿날 술이 깬 뒤 찾아가 진위를 물었다. 그런데 이분이 하시는 말씀. “아니면 말고….”

그냥 웃어 넘기긴 했지만 그 정치인에 대한 신뢰가 내 기억 속에서 모조리 빠져나가는 경험을 했다. 기자 생활을 해오며 가장 신경써야 할 게 취재원의 ‘아니면 말고’식 발언을 가리는 일이다. 이걸 소홀히 했다간 낭패는 몽땅 내 몫이 돼 버린다. 사설이 길었다.

개천절인 10월 3일 아침 청와대에서 긴급 경제상황점검회의가 열렸다. 대통령이 소집한 회의였다. 휴일인데도 국무총리를 포함해 경제부처 장관들과 수석들이 모두 모였다. 4시간이나 걸린 회의 결과가 청와대 대변인의 브리핑을 통해 발표됐다.

“아시아가 세계의 성장 엔진인데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의 실물경기 침체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역내 공조체제 강화를 위해 한·중·일 재무장관 회의를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

대통령의 지시였다고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외교통상부 쪽이 바빠졌다. 한·중·일 재무장관 회의가 성사되려면 외교 채널을 통한 협의가 필수다. 사전에 정보를 듣지 못한 외교부는 대통령의 진의부터 알아내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이틀 뒤는 일요일이었다. 기획재정부 차관보가 긴급 브리핑을 하겠다며 기자들을 모았다. 한·중·일 재무장관 회의를 추진하기 위한 후속 조치를 설명했다. 하지만 차관보의 얘기는 뱅뱅 돌았다. “대통령의 말씀은 3개국이 리더십을 발휘해 아시아 금융위기에 대한 대처 방안을 모색하라는 취지로 알고 있다” “곧 있을 IMF 총회 때 중국 재정장관은 오지 않고, 일본 재무성 장관도 반나절 정도 G7 회의만 참석하기로 돼 있어 3개국 장관이 IMF 총회에서 만나긴 어렵다” “일단 차관급 회의부터 개최하겠다”…. 한·중·일 재무장관 회의든, 한·중·일 재무차관 회의든 아직은 열렸다는 얘기가 없다.

10월 6일 이번엔 대통령과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가 만났다. 아이디어는 진화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표로부터 금융위기 대처를 위한 한·중·일 3국 정상회담 개최를 건의받은 대통령은 “좋은 생각”이라며 “베이징에서 열릴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에서 한·중·일 금융 정상회담을 제안하겠다”고 말했다.

지금의 경제 위기가 전 세계 금융시장의 동시다발적 위기에서 비롯되고 있는 만큼 한·중·일 재무장관회의나 한·중·일 금융정상회담은 성사만 된다면 시장의 환영을 받을 해법이다. 한나라당이 하는 일에 비판을 아끼지 않는 진보신당조차 “미국발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정부가 내놓은 대책 중 유일하게 솔깃한 제안”이라고 논평했다.

그러나 외교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상대가 있고, 타이밍이 중요하다. 각 나라가 처한 경제 상황도 다르다. 당장 가와무라 다케오 일본 관방장관은 9일 기자회견에서 “아시아 지역에서도 정상회의가 필요한지 G7 재무장관·중앙은행장 회의 결과를 보고 검토해 나갈 것”이라고만 했다. 중국은 아직 반응이 없다.

한·중·일 금융정상회담은 언젠가 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중대한 제안이 상대방에 대한 의사 타진이나 부처 간 사전 조율 없이 즉흥적으로 발표되는 건 문제다. 무엇보다 우리가 더 다급하다는 인상을 국제 금융시장에 줄 수도 있다. 이런 ‘익지 않은’ 제안의 진원지가 대통령임을 고스란히 밝히는 것도 메시지 관리 측면에서 되돌아볼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23일 베이징에서 열리는 ASEM 회의에 참석한다. 청와대 측은 “이번 회담에서 3자회담은 확답할 수 없지만 중국과 일본 중 어느 한 곳과는 재무장관 간의 만남이 추진되고 있다”고 말했다. ‘아니면 말고’가 아니길 빈다.

박승희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