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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 "한국인 삶, 책 속에 녹였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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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36년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많은 외국인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한국인의 삶과 역사에 무관심했습니다. 무시 당한다는 생각보다 그동안 우리는 뭘 했던가 하는 자성이 앞섰습니다. 그래서 '감히' 영문 소설을, 그것도 우리나라 근대사를 소재로 한 영문 소설을 쓰게 됐습니다."

KCC(금강고려화학) 정종순(鄭鍾淳.61) 고문이 최근 '순이'(호영출판사)라는 소설책을 펴냈다. 지난해 6월 비매품으로 출간했던 영문 소설 'Sooney, a traveler on the angry waves'를 보완해 국내 독자들이 읽기 쉽게 한글로 출간한 것이다.

그는 지난해 이 영문 소설을 미국.영국.호주 등 영어권 나라 1300여개 공공도서관에 두권씩 보낸 바 있다.

"소설 속의 '순이'는 일제의 사슬과 전통사회의 봉건적 잔재에 시달리면서도 끈질기게 삶을 영위해온 지난날의 우리 누이요, 어머니입니다. 그 삶에는 속고, 억압받고, 무시당하면서도 강인하게 버텨온 지난 세기의 우리 역사가 녹아있습니다."

鄭고문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20여년을 준비했다. 서울대 상대 재학 시절 교내 영자신문인 '이코노미스트'에 영어 단편소설을 기고하기도 했던 그였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 영어로 글을 쓸 기회는 많지 않았다.

"1983년 대한항공 007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됐습니다. 그 사건을 보며 '나라 팔자는 무엇이고 그 백성의 팔자는 무엇인가' 하는 화두(話頭)가 생겼죠. 이것이 '순이'를 태어나게 했습니다."

鄭고문은 그 때부터 자료를 모았다. 퇴근 후에는 물론 주말과 휴가도 이용했다. 93년부터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존 스타인벡의 소설, 그리고 시드니 셀던의 추리소설을 원문으로 읽으며 글쓰기 공부를 했다. 그리고 2000년 서울 서초동의 한 오피스텔에 사무실을 마련해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갔다. 그는 "글을 짧게 쓰면서 내용을 쉽게 전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말했다.

소설을 쓰면서 한민족의 '질곡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체험했다는 鄭고문은 "지금의 나라 상황이 서로 물고 놓지 않다가 어부에게 둘 다 잡히고야마는 조개와 황새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스럽다"고 했다.

김동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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