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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의 마음 엿보기] 마약처럼 빠져드는 ‘빚 중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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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호 15면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선진국에는 알코올 중독 예방 프로그램처럼 빚 중독 예방 및 치료 프로그램이 많다. 빚 중독인지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테스트도 있다. ①카드 빚이나 남에게 진 빚은 항상 최소한만 갚거나 돌려 막는다. ②갚아야 할 제날에 맞추어 이자나 원금을 물지 못한다. ③집을 잡혀서라도 일단 돈을 쓰고 보겠다고 생각한다. ④빚을 갚아 나가는 것에 대한 장기적 계획이 없다. ⑤배우자와 빚 문제로 다툰다. ⑥항상 수입보다 지출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친척의 돈을 빌리거나 보증을 서게 한다’는 항목이 여기에 더해질 것 같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위 항목에 모두 해당되는 이가 많다. 죽을 때까지 돈을 대주는 누군가가 없는 한 ‘명품족’이나 ‘신상녀’의 종말은 빚 중독자다. 빚 중독이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처럼 번진 미국과는 조금 다르지만 안이하게 잘못 투자했다가 결국 무서운 사채에까지 손대는 경우도 있다. 점점 더 강한 약을 쓰게 되는 약물 중독자처럼 점점 더 센 이자의 늪에 저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이다.

빚 중독자들은 주로 허황된 판타지에 빠져 현실성 없는 소비를 하는데, 이는 내적 공허감, 자신감의 부족, 적절한 경제교육과 훈육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열등감이 깊어 ‘한 방’에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할 무언가를 보여 주겠다는 강박적 사고도 보인다. 은행 대출이건 부모 도움이건 남의 돈으로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죄의식이나 불안감도 별로 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부모와 자녀가 서로 분리불안 때문에 병적(病的) 공생관계에 있는 경우는 경제교육을 시키는 대신 무한정 돈을 대주며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다 자녀를 결국 빚 중독자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 부모 중에는 돈으로 자식을 조종하는 경우도 많다. 반대로 국내외 일류 대학을 나온 자식들의 허황된 씀씀이와 투자 때문에 거덜난 노년층의 정신과 상담도 눈에 띄게 늘고 있는 추세다. “돈 걱정 말고, 집안일 상관없이 공부만 하라”고 가르친 결과다. 주관 없이 ‘남이 하면 나도 한다’며 부화뇌동하는 이들도 빚 중독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자칭 ‘금융 허브’라는 미국의 월가(街) 역시 재화 생산 없이 남의 돈으로 주식 사고 집 사서 돈 벌겠다는 심산이었으니 일종의 빚 중독 집단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어떤 치료가 필요할까. 우선 자신이 빚 중독자란 점을 확실하게 인정해야 한다. 만약 문제점에 대한 통찰의 가능성이 없다면 입원도 필요하다. 머리 좋고 학벌 좋은 빚 중독자 때문에 사돈의 팔촌까지 모두 신용불량자가 되다 보니 가족 치료가 필요할 때도 많다. 친지 중 빚 중독자가 있으면 돈 문제로 싸움이 나서 이혼, 가정폭력, 자살, 심지어 살인 사건도 발생한다.

빚 중독을 예방하려면 어려서부터 경제관념을 철저하게 몸에 익히는 것이 필요하다. 과시용 소비보다 노동과 저축, 그리고 소박함이 몸에 밴 스위스와 북유럽 3국이 글로벌 위기를 견디면서 소비왕국인 미국보다 몇 배나 잘살게 된 이유를 제대로 보자.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나 벤담의 공리주의를 신봉하는 고전경제학 이론이나, 경제가 수학의 원리대로 움직인다는 과학주의적 경제학보다 마치 카를 융의 ‘집단 무의식’ 개념처럼 불합리하게 돌아가는 경제행태를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교정하려는 행동경제학이 다시 각광받을 만하다. 그간의 허장성세를 버리고 철저하게 내실을 다진다면 불황은 오히려 한 차원 높은 건전한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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