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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 위협운전에 손가락질·욕설까지…여성 운전자는 괴로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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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11년 운전 경력의 주부 권명자(59.서울 삼성동)씨는 몇달 전 운전 중에 황당한 경험을 했다. 한남대교를 건너던 중 ○○○번 버스가 무리하게 끼어들려 했지만 권씨는 양보하지 않았다.

강남역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 중에 옆에서 그 버스 기사가 창문을 열고 소리를 질렀다. "아줌마 차에서 냉각수가 흐르는 것을 보고 왔다. 불나게 생겼으니 빨리 점검하라"는 것. 화들짝 놀란 권씨가 차를 세우고 권씨의 남편이 달려오는 소동이 벌어졌지만 냉각수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권씨는 "아줌마 운전자여서 놀림감이 된 것 같다"며 분해했다.

한국의 여성 운전자는 600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전체 운전자의 3분의1 수준.

'장롱면허'를 포함해 여성 면허증 소지자는 800여만명으로 집계됐다. 여성 운전자가 보편화됐다는 얘기다.

하지만 여성 운전자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난폭 운전의 위협과 여성 비하적 편견에 시달린다고 호소한다.

반면 일부에서는 여성 운전자 또한 충분히 연습하고 기량을 익혀 미숙 운전, 얌체 운전을 탈피해야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아줌마는 집에서 밥이나 하지…"=최근 '여성은 달리고 싶다'(산지刊)라는 책을 출간한 자동차 전문가 이상원씨는 여성이 흔히 당하는 위협운전 사례로 ▶여성 운전자의 차 꽁무니에 바짝 따라붙기▶여성 운전자에게는 갑자기 끼어들면서 양보는 잘 하지 않기▶출발이 조금만 늦어도 빵빵거리거나 욕설하기▶좋은 차를 운전하면 괜히 째려보거나 손가락질 하기 등을 꼽았다.

자동차전문 리서치회사인 에프 인사이드가 2002년 남녀 운전자 1만5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여성 응답자의 81.7%는 '남성이면 그냥 넘어갈 일을 여성 운전자가 실수하면 욕을 먹는다'고 응답했다.

회사원 정숙진(38)씨는 "길이 막힐 때 택시 기사가 여성 운전자를 손가락질하며 '아줌마가 집에서 밥이나 하지'라며 욕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1999년 한경자동차신문이 자동차 구매 목적에 대해 조사한 결과 응답 여성의 45.3%가 출퇴근이나 사업상 필요해 차를 산 것으로 나타났다.

자동차 전문가 이상원씨는 "'아줌마가 할 일 없이…' 라는 생각은 편견"이라며 "여성 운전자를 비하하는 문화를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고 처리 미숙해 덤터기 쓰기도=2002년 한 해 동안 여성 운전자에 의한 사고는 2만8000여건으로 전체 교통사고의 12.5%를 차지한다.

여성 운전자의 사고 원인으로는 속도위반.안전벨트 미착용 등 안전운전을 하지 않아 발생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하지만 여성이 남성에 비해 사고를 많이 내는 경우로는 신호위반과 교차로 운행 때였다. 최근 '여성의, 여성을 위한 운전기술'(보누스刊)이란 책을 번역.발간한 '자동차 10년 타기 시민운동연합'의 임기상 공동대표는 "신호가 바뀌는 경우 정지할 것인지 통과할 것인지 머뭇거리다 사고를 내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사고 처리 과정에서도 위협감을 느끼거나 부당함을 호소하는 여성운전자가 많다. 남성 운전자의 잘못으로 앞차를 들이받고도 여성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거나, 엇비슷한 잘못으로 사고가 났을 때 큰소리를 지르며 협박하는 경우, 여성 운전자가 사고를 냈을 때 다른 부품까지 교체해 바가지를 씌우는 경우 등이다.

일방통행로를 역주행하다 고의사고 보험사기단에 걸려드는 경우도 여성이 피해자의 절반이 넘는다. 이상원씨는 "일방통행로로 잘못 들어섰거나 질러가려다 마주오는 차를 피했는데도 상대차가 들이받고 사고를 내는 경우는 100% 보험사기단에 걸려든 것으로 보면 된다"고 귀띔했다.

일방통행로 사고는 보상과 상관없이 형사처벌받는다는 점을 악용해 협박당하는 경우가 많다.

◇남자에 맞춘 차량이 여성 운전자 안전 위협=임기상 대표는 "현재의 차량은 키 1m70cm, 체중 70kg의 남성을 기준으로 설계됐다"며 "이는 여성이 큰 남자 신발을 신고 달리는 꼴이어서 여성 운전자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에쿠스 등 최고급차량을 제외한 국내 대부분 차량은 운전석 시트를 높이더라도 엉덩이 부분만 올라가도록 돼 있다는 것. 이 경우 운전자 상체와 핸들이 가까워져 사고시 부상위험이 크다는 지적이다.

임대표는 또 "18kg이나 되는 비상용 타이어도 여성들이 교체하기에 부적합하다"고 말했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 사고 땐 이렇게…스스로 판단 말고 보험사.경찰에 알려야

여성 운전자는 욕을 듣거나 위협당할 때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게 상책이다.

'여성은 달리고 싶다'의 저자 이상원씨는 "뒤에서 요란하게 경적을 울려대도 서두르지 않으면 뒤차가 스스로 포기하거나 차선을 변경하게 된다"고 조언했다.

사고를 당했을 때는 정신을 바짝차리고 우선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자동차 10년 타기 시민운동연합'의 임기상 대표는 "사고 차량을 옮기기 전에 현장에 스프레이를 뿌리고 사진 촬영을 해두며 발생경위에 대해 메모를 한 뒤 상대방의 사인을 받아 놓아야 나중에 잘못을 뒤집어쓰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죄송하다' '미안하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잘못이 인정되면 진심으로 사과해야 하지만 시시비비가 가려지기 전에 이 같은 말을 하면 책임을 인정한 것이 되기 때문.

사고가 큰 경우는 경찰이나 보험회사.가족 등에 재빨리 알리는 게 좋다. 이를 위해 관련 전화번호는 항상 차안에 비치해야 한다. 특히 가족 몰래 처리하려다 상대방에게서 과도한 합의금을 요구당하는 일이 많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자동차에 대한 기본 지식을 충분히 숙지한 다음 운전하는 것. 주부 이은주(37.서울 개포동)씨는 "차로 변경 시 미리 깜박이를 켜거나 자신없는 주차를 할 때는 급한 차에게 양보하고, 손올림 등으로 감사함을 표시하는 일만 해도 여성이라고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경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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