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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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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만엽집(萬葉集)』이라는 고대가요가 일본에 있다.우리의 「신라 향가(鄕歌)」와 한짝같은 노래다.
향가는 한자(漢字)로 엮어져있으나 한시(漢詩)는 아니다.한자의 음독(音讀)과 훈독(訓讀)에서 빚어지는 소리를 두루 이용하여 신라말 노래를 한자로 적은 것이다.우리 고유의 글자인 한글이 없었던 옛날 한자를 한글처럼 써서 고대어를 표 기한 셈이다.이런 적음새를 향찰체(鄕札體) 또는 이두체(吏讀體)라 하는데『만엽집』도 똑같은 방법으로 읊어져 있다.
삼국시대 후기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읊어진 시기도 대체로 비슷하다.
정치적인 사건과 사랑을 소재로 삼은 것도 흡사하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노래의 분량이다.
신라 향가가 『삼국유사』안에 14수만 간간이 실려 전해져온데비겨 『만엽집』은 자그마치 4천5백16수가 20권의 가집(歌集)으로 묶어져 남아있다.태반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7세기 후반과 통일신라가 기틀을 잡은 8세기 전반에 당 시의 고관들이주로 읊은 노래들이다.
『만엽집』이 고대 한국어로 읊어졌다는 사실을 일러 준 것은 켄트교수였다.
『정말입니까?』 놀라 되묻는 을희에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있게 웃어보였다.
『내 발견이 아니예요.오래 전부터 일본 학자들 스스로가 해온말입니다.하지만 그런 말을 한 학자들은 학계에서 추방되거나 옥살이하다 죽거나 했습니다.』 『그 사실을 한국학자들은 몰랐습니까?』 『글쎄,일부에서는 알았겠지요.』 『알면서 왜 연구를 하지 않았을까요?』 『일본 강점(强占)시대에 그런 연구를 했다가는 귀신도 모르게 잡혀 죽었겠지요.민족사학자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선생도 「무정부주의자」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끝내 옥사(獄死)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해방 후엔 얼마든지 할수 있었을 텐데요.』 『실은 그것이 답답한 점입니다.닥터 고에게 얘기했더니 사학(史學)을 하는 자기 눈에도 더러더러 보이는데,언어학자들은 뭘하는지 모르겠다더군요.』 『보인다니,뭐가 말입니까?』 『고대 일본어가 바로 고대 한국어라는 사실이지요.』『고대 일본어가 바로 고대 한국어?』 처음 듣는 알음알이가 을희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켄트교수 집 뜨락에서는 드넓은 대서양(大西洋)이 바라다보였다.고대의 바다는 길이었다.동해나 현해탄도 일본으로 건너가는 지호지간(指呼之間)의 길이었을 것이분명하다.
『아,참.거기에 관심을 둔 한국인 학자가 한분 있어요.』 그는 제주도에 산다는 나(羅)선생을 소개해주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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