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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의 블랙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3호 30면

2003년에 작고한 미 MIT의 국제경제학자 찰스 킨들버거는 금융위기를 잘 죽지 않고 몇 년마다 되살아나는 다년생 식물(hardy perennial)에 비유했다. 그의 명저 『마니아, 패닉, 대폭락-금융위기의 역사』는 1978년 첫선을 보였다. 주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위기들을 다루었다.

87년 뉴욕 월가의 ‘검은 월요일’ 대폭락을 겪으면서 89년에 2판을 썼고, 90년 일본의 금융위기와 94~95년 멕시코 금융위기에 주목하면서 96년에 3판을 찍었다. 다시 97~98년 태국·한국 등 아시아 금융위기를 계기로 2000년 4판을 내놓았다. 당시 MIT의 동료교수 폴 새뮤얼슨은 “앞으로 5년 안에 언젠가 당신은 이 책을 읽지 않은 것을 스스로 책망하며 다시 읽게 될지도 모른다”고 서평을 썼다.

그의 책은 한마디로 통화 및 신용의 잘못된 관리가 어떻게 금융 대폭발을 불러 오는가를 학문적으로, 그것도 수학 공식이 아닌 ‘말’로 설명한 것이다. 그는 빌린 돈에 의한 투기를 ‘경제바이러스’로 규정하고 이 바이러스가 군중심리와 부화뇌동에 휘말려 국제위기로 번지는 과정에 주목하면서 종전의 전파(propagation) 대신 전염(contagion)으로 표현을 바꾸었다.

미국 주택시장에서 촉발된 금융위기는 어느새 우리 모두의 위기로 전이되고 있다. 실물경제의 성장을 훨씬 웃도는 과도한 신용팽창이 그 주범이고 그 거품이 급작스레 꺼지는 신용경색으로 세계가 홍역을 치르고 있다. 그 배후에는 선진금융의 총아 파생상품이 있다.

기초자산에서 파생상품이 나오고, 파생이 또 다른 파생을 거듭하며 아름답고 거대한 금융 모래성을 쌓아 올렸다. 그 파생의 구조는 블랙홀처럼 어둠 속이고, 어떤 변수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당장 내일 어떤 파생상품이 파탄 날지, 그로 인해 어떤 금융회사와 어떤 나라가 구제금융의 긴급 수혈을 받는 위기에 빠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누구도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라면 누구도 신뢰할 수 없고 누구도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는다. 불신이 금융을 붕괴시키는 단계까지 온 것이다.

금융 모래성의 구축에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일단의 금융경제학자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블랙 숄스(Black-Scholes) 모델과 모딜리아니-밀러 정리(Modigliani-Miller theorem)가 두 기둥이다. 기초자산의 가격변동 위험을 옵션 등 분산투자의 수학적 구성으로 완전 제거할 수 있다는 ‘신화’가 블랙 숄스 모델이다. 여기에 기업의 가치는 부채의 유무와 상관없다는 ‘M-M 정리’가 날개를 달았다.

블랙 숄스 모델은 87년 ‘검은 월요일’ 대폭락 때 비현실성이 이미 입증됐다. 위험회피는커녕 갑작스레 수천억 달러의 투자자산이 증발하고, 기초자산의 가격변동성과 널뛰기가 설명 안 돼 금융위기가 거듭될수록 불신이 쌓여왔다. 그러나 수학적으로 너무 정교하고 훌륭해 이의를 제기하면 수학 못하는 무식꾼으로 놀림받는 분위기였다.

또 ‘M-M 정리’는 자기자본의 수십 배에 달하는 돈을 빌려 투자하는 거의 무한대의 레버리지(leverage)를 정당화했다. 경제 및 금융활동을 활성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지만 이 과정에서 복잡성과 불투명성, 고위험성과 불확실성을 증폭시켜 왔다.

무모한 레버리지의 모래성은 유수 독립 투자은행들의 몰락으로 그 허구가 드러났다. 블랙 숄스 공식은 실제 시장에서 적용되지 않았으며, 현실적으로 필요하지 않고, 이론적 독창성도 없어 노벨상을 취소해야 한다는 반론이 새삼 주목받는 요즘이다.

파생상품과 헤지(위험회피)의 수학모델 맹신과 그 무지에 따른 폐해는 이미 곳곳에서 소동을 빚고 있다. 헤지와 변동성 상품에 대한 금융 베팅은 엄연히 구분된다. 한국의 중소기업들은 키코(환위험 회피 상품)가 환헤지 수단인 줄로만 알고 고투기성 금융 베팅을 하다 큰 낭패를 보고 있다. 이를 판매한 은행도, 사들인 기업도 그 정확한 실체를 모른 채 국제 투기세력의 머니게임에 희생된 것이다. 잘 아는 척하며 매입을 권하고, 모르면서 투자하고, 헤지해야 할 때는 안 하고, 하지 말아야 할 때 애써 하며 너도나도 금융 블랙홀로 빨려들어간 결과가 오늘의 위기다. 금융공학의 가공할 위력이자 수식으로 포장된 희대의 허구(虛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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