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자를 부를 수 없었던 베이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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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호 34면

올림픽을 통해 세계를 하나로 만든 베이징은 내게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베이징의 경험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8월 내가 살고 있는 로마에서 12시간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에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풍경은 ‘Under the Five Rings’라는 올림픽 공식 주제가를 생전 처음 중국어로 불러야 하는 걱정을 잊을 정도로 놀라웠다. 햇빛에 반짝이는 고층빌딩, 넘치는 차량. 젊은 여성들의 옷차림은 짧아져 있었고 어린아이들의 귀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시 10여 년 전 베이징의 추억에 잠겼다. 그땐 겨울이었다. 오후 5시면 어둑해지는 시내 중앙대로에는 이따금씩 몇 대의 차량만 오갔다. 가로등조차 없어 음산했다. 구멍 뚫린 까만 연탄을 실은 트럭들이 길거리에 나란히 줄을 지어 마치 전쟁 중인 느낌이 들었다. 도시 전체가 추위를 녹이는 연탄 냄새와 연기로 왠지 슬픈 생각이 나게 만들었던 장면들이 생생하다. 추억에서 깨어난 2008년의 베이징은 타임머신을 타고 처음 온 도시 같았다.

독창회를 포함한 네 번의 콘서트를 앞두고 중국 기자들을 만났다. “동양인으로서 어떻게 그 힘든 유럽 오페라 무대에 자리 잡을 수 있었는가.” “작은 몸집 어디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가.” 세계로 향한 중국인의 관심을 느낄 수 있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나는 “There is a will, there is a way”라고 답변했다. 의지만 있으면 길은 있다는 영감을 동양인인 그들과 나눠 갖고 싶었다.

베이징의 엄청난 발전과 열정 뒤로는 아직 변하지 않은 중국의 모습도 있었다.
드디어 독창회 날. 전석이 매진됐다. 공연 두 시간 전인 8시 메이크업을 하려고 분장실 거울 앞에 앉는 순간 갑자기 극장감독이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조수미씨, 곤란하지만 ‘선구자’는 부를 수 없게 됐어요.” ‘선구자’는 작곡가 임긍수 선생님의 ‘강 건너 봄이 오듯’과 함께 프로그램에 넣은 한국 가곡이다. 중국인에게 우리 가곡의 아름다움을 알리려고 멋지게 편곡된 선구자를 준비한 상황이었다.

중국은 음악회 때 부르는 모든 노래 가사를 한 달 전 검열받아야 한다고 했다. 음악회 기획 당시에는 아무 말이 없었기에 나는 듣지 못한 얘기였다. 올림픽 개막식을 보러 오셨던 앙드레 김 선생님이 나에게 “선구자는 중국에서 부르기 힘들지 않겠느냐”며 고개를 갸우뚱하던 기억이 그제야 났다. 그 노래 가사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일부러 넣은 곡은 아니었다. 음악가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멜로디라는 차원에서 넣은 곡인데…. 아쉽지만 선구자는 앙코르 곡으로 준비한 다른 노래로 대체해야 했다.
그래도 중국의 환호는 뜨거웠다. 공연을 마치고 함께했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열흘 동안 많은 연습시간에 아침저녁으로 같이 지낸 중국 오케스트라 멤버들과도 서로 다독여 주고 웃음으로 인사했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처럼 친해진 터였다. 나는 중국인 청중이 보여 준 나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기억한다. 음악을 통해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의 정서적 공감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나는 갖게 됐다. 이것은 곧 나와 내 음악에 거는 희망이기도 하다.

중국은 오페라·심포니·음반매체가 아직 활성화되지 않아 많은 사람이 음악의 혜택을 누리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미래는 밝고, 가능성과 의지로 가득한 나라이며, 우리와 가까운 이웃으로 앞으로 더 많은 영향을 주고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번 올림픽 기간에 있었던 첫 중국 독창회 이후 나는 올해 베이징 음악 페스티벌에 초대됐다. 내년 5월에는 중국 투어도 예정됐다. 중국인이 사랑하는 노래 ‘나는 창장에 살아요’를 앙코르 곡으로 마련해 놨다. 물론 중국어로 부른다.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그 나라의 노래를 불러 주는 것이 음악으로 사람들을 묶는 방법임을 배웠기 때문이다.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이 따낸 많은 메달 뒤에는 엄청난 시간의 훈련, 자기와의 싸움이 있었을 것이다. 중국은 또한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많은 부분을 개방했고, 세계와 공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88 서울 올림픽이 한국이 세계로 도약하는 데 발판이 되었듯이 중국도 경제성장만큼 인권에 대한 존중이나 환경문제 등 세계인이 기대하는 다른 면에서도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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