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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에 드리운 일본 거품경제의 그림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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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호 04면

성실한 은행원 구리자카의 약혼녀가 사라졌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스물여덟 살 세키네 쇼코. 쇼코가 수년 전 개인파산을 했던 사실을 알게 된 구리자카가 경위를 추궁하자 이튿날 자취를 감춘 것이다. 사라진 약혼녀를 찾아달라는 조카의 부탁에 휴직 중이던 형사 혼마 슌스케는 쇼코의 주변 사람들을 탐문하며 행적을 되짚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라진 약혼녀가 ‘세키네 쇼코’가 아니라는 게 밝혀진다.

- 미야베 미유키의 추리소설 『화차』『이유』

이름과 신분을 도용하며 살아온 다른 여성 신조 교코였던 것이다. 진짜 쇼코는 어찌 됐을까, 신조 교코는 왜 그래야만 했던가. 의문의 퍼즐을 맞춰 나가는 필력에 500쪽 분량의 소설이 술술 읽힌다. 일본 추리소설의 여왕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48)의 대표작 『화차』(1992)다.

‘미야베 월드’라고 불릴 정도로 확고한 색깔을 자랑하는 미야베는 일본 최고의 대중문학 작가다. 일상의 사소한 범죄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스텝 파더 스텝』『대답은 필요 없어』, 지극히 평범한 탐정 스기무라 사부로를 내세운 『누군가』『이름 없는 독』, 게임 내러티브를 차용한 『드림 버스터』『이코-안개의 성』 등 미스터리·SF·판타지·시대물을 넘나든다. 그중에서도 그녀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장르가 이른바 ‘사회파 미스터리’다. 사회의 어두운 면과 인간의 욕망을 탁월하게 직조해낸 『화차』『이유』『모방범』 등은 모두 일본 대중문학계의 주요 상을 휩쓸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미야베에게 93년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안긴 『화차』는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수수께끼를 풀어 가는 르포르타주 기법을 취하고 있다. 소설에 사실감을 더하는 것은 세키네 쇼코의 개인파산에 당대 일본 사회를 축소하듯 구성해 낸 점이다. 80년대 남발된 신용카드가 ‘부지런하고 마음 약한’ 개인을 다중채무자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세키네 쇼코는 최악의 상황에서 개인파산을 함으로써 채무를 면제받았다.

하지만 같은 하늘 아래 다른 곳에선 신조 교코가 신음하고 있었다. 주택 대출을 갚을 수 없어 온 가족이 고향에서 야반도주했건만, 사채업자의 마각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두 사람의 기구한 얽힘을 미야베는 “동족이 동족을 잡아먹는” 상황으로 묘사한다.

『화차』에서 신조 교코 가족의 비극을 초래한 부동산 가격 폭락은 『이유』(98)에서 전면에 재등장한다. 도쿄에 있는 25층짜리 고급 아파트에서 일가족이 숨진 채 발견되는데, 숨진 4명은 원래 살던 가족이 아니라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로 밝혀진다. 이들은 왜 여기 모여 함께 죽게 됐을까.

다양한 사람의 시점을 복합적으로 보여 주는 『이유』에서 진짜 주인공은 일본 경제가 활황이던 85년 착공돼 거품 붕괴 원년인 90년 입주를 시작한 아파트다. 살인 사건의 주범 역시 부동산을 둘러싼 건축업자·중개업자·대부업자·경매업자들의 횡포와 그들에게 편승해 이익을 도모하려는 인간의 허튼 욕망인 셈이다. 이 소설에 만장일치로 나오키 상을 수여하면서 심사위원단은 “현대 일본의 빛과 어둠을 드러내고, 사회와 인간을 폭넓게 그린 발자크적인 작업”이라고 평했다.

미야베는 지난해 5월 월간지 ‘판타스틱’과의 인터뷰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을 재미있게 봤다”며 “문화의 차이가 있어도 아시아의 일원으로서 각 나라에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미야베는 2001년 작 『모방범』에서 여성만 노린 연쇄살인 사건을 다뤘다).

카드 대란을 한바탕 겪고 부동산값 폭락을 우려하는 한국에 일본의 고통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화차』와 『이유』가 서늘하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언젠가 벌어질지 모르는 연쇄살인의 공포 때문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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