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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가볍게 끌어당겨 뺨에 입을 맞추고나서 속삭였다.
『내일 아침 7시 아래층 커피 라운지에서 기다리겠습니다.식사같이 합시다.』 그는 얼른 복도로 걸어나갔다.
을희는 한동안 멍청했다.별것도 아닌 약속을 속삭이듯 한 고교수의 몸짓에서 을희에 대한 사랑을 읽을 수 있었다.연약하나 내내 자랄 기세인 하얀 사랑의 싹을….
고개를 저었다.
구실장에 이어 고교수.일의 파트너와 매번 남녀간의 관계로 빠질 수는 없다.혼자 사는 여자가 집 울타리를 나서서 일하는 어려움을 거듭 실감했다.남녀 사이엔 우정이란 정녕 바랄 수 없는것인가.나른하면서 피곤이 밀어닥쳤다.
침대에 쓰러져 잠에 빠졌다.
바닷가 은모래 밭이었다.짙푸른 파도 속을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가 있다.알몸의 켄트교수다.돋아오른 몸가락이 유난히 크다.
저렇게 큰 몸가락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얼 켄트는 안고 온 타월을 모래밭에 깐다.그것은 타월이 아니라 향기로 운 해당화 꽃 무더기였다.가뿐한 헝겊인형이라도 들어올리듯 을희를 꽃 무더기 위에 눕히고나서 얼 켄트가 육신 속으로 들어왔다.동굴이 가득히 채워지면서 뿌듯했다.육모방망이만한 저 단단하고도 큰 것이어떻게 감쪽같이 들어왔나 신기했다.힐 끔 쳐다보니 얼 켄트가 아니라 고일호의 얼굴이 아닌가.기겁을 하여 몸을 비틀다 강한 오르가슴을 느끼고 꿈을 깼다.
이혼한 후로 종종 섹스하는 꿈을 꿨다.모두 얼굴 없는 남자였다.얼굴은 있되 보이지 않는 것이다.
분명히 누구라고 알 수 있는 남자와 얼린 것은 처음이다.그것도 한꺼번에 두 남자의 얼굴이 포개져 보이다니….
잠재의식의 밑바닥을 들여다본듯 마음이 편치 않았다.
『너무 심려치 말아요.글이야 받든 말든 나중 일이고,켄트교수의 지식을 한가닥 흡수한다는 생각으로 지내도록 하십시오.닷새후에 파리서 돌아와 모시러 가겠습니다.』 묵묵히 아침 식사를 하는 을희를 고교수가 달래듯했다.켄트교수 집에서 지내는 것을 몹시 부담스러워한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어제 꿈에 자기와 섹스한 것을 이 남자는 모르고 있다.알턱이없는 데도 어쩐지 수줍었다.이 묘한 의식으로 인한 얼굴의 그늘을 고교수는 직업상 스트레스로 생각하는 것같았다.
사실 신체장애자가 된 켄트교수를 온종일 바라보고 지낸다는 일은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열정적으로 한.일고대 교류에 관한 이야기를 펴나가는 그에게 눈물겨운 아픔을 느꼈다.
휠체어로 다가가 허리 굽혀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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