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앙겔로풀로스 감독 "안개속의 풍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그동안 풍문으로 전해 듣던 그리스의 거장 테오 앙겔로풀로스(61)의 작품이 처음으로 소개된다.
21일 개봉되는 『안개속의 풍경』은 앙겔로풀로스 영화미학의 일단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오랜만에 예술영화의 참맛을 선사해 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앙겔로풀로스 영화의 특징은 역사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을 시적인 서정으로 절묘하게 녹여 낸다는 것.평생 수수께끼 같은 삶의 근원을 응시한 점에서 타르코프스키나안토니오니를 연상시키지만 거기에 다가가는 방식이 독창적이다.
타르코프스키가 종교적 자의식으로 걸러낸 균질적인 사랑에서 희망을 발견한 수도사였다면 안토니오니는 포착되지 않는 삶의 실체를 완전한 소통의 개별적 사랑속에서 찾으려 했던 비관적 로맨티스트였다.
희망을 찾기 위해 한명은 육체를 버렸고 한명은 육체를 파고 들었다. 앙겔로풀로스의 방식은 신성(神聖)도 에로티시즘도 아니다. 그는 역사라는 출구로 들어가 삶의 근원을 찾아헤매는 서사시인에 가깝다.
『안개속의 풍경』에서 그는 뿌리를 찾는 어린 남매로 변신해 길을 떠난다.
얼굴도 못본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12세의 소녀 불라와 동생 알렉산더는 『독일에 있다』는 엄마의 말을 듣고 열차에 오른다.
영화는 이들이 독일에 도착할 때까지 겪는 고난에 찬 체험을 따라간다.
불라는 트럭운전수에게 강간당하고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청년에게 첫사랑을 느끼지만 호모임을 알고 좌절한다.
또 승차권을 사기 위해 군인을 상대로 매춘까지 시도한다.
이 험난한 불라의 여정에는 황량한 그리스의 풍경들이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울며 뛰어나오는 신부,사지가 묶인채 눈밭에서 죽어가는 말,국기 하강식을 위해 시가를 행진하는 군인들,공연장을 찾지 못해 황량한 해변에서 대사를 외우는 극단,멀리 안개속으로 사라지는 텅 빈 고속도로등.
이들 삽화는 아무 관련이 없는 듯하면서 점령과 압제로 점철돼온 그리스 현대사의 단면들을 징검다리처럼 이어간다.
그래서 불라가 마침내 국경에 도착했을때 그녀의 여정은 자연스럽게 그리스의 현대사와 포개진다.
여기서 불라는 국경을 가로지르는 강위의 캄캄한 어둠과 자욱한안개를 본다.그 자리에서 감독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세기말의 풍경을 보고 있을까.
그는 사뭇 비관적이다.처음부터 없었던 아버지를 찾아 강을 건너던 불라와 알렉산더는 국경수비대의 총성 두방과 함께 까만 어둠속에 묻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감독은 삶에 대한 간절한 희망을 향해 달려간다. 영화는 빛의 과다 노출로 하얗게 표백된 화면에서 피안(彼岸)에 다다른 남매가 『태초에 어둠이 있었어.그 후에 빛이 만들어졌지』라는 말을 남기고 언덕위의 나무로 달려가 포옹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삶의 궁극적 희망에 대한 갈망과 역사에 대한 회의의 두 갈래길 앞에서 감독은 머뭇거리며 관객들을 그 험한 여로속으로 끌어들인다. 스러지는 사물의 순간을 포착한 인상파의 걸작 1백여편을 애절한 그리스의 음악을 들으며 감상하는 즐거움을 주는 영화. 올해 선보인 작품중에 역설적이지만 가장 쓸쓸하고 아름다운 영화다.
남재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