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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21세기에 조선 유학을 다시 묻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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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왜 조선유학인가
한형조 지음, 문학동네, 398쪽, 2만원

조선유학의 거장들
한형조 지음, 문학동네, 430쪽, 2만2000원

 “자다 깬 허황된 소리, 육경(六經)에서 시작했지/진시황이 시원하게 불을 잘도 싸질렀다/아깝다, 그때 몽땅 다 태우지 못하고… (후략)” -‘서분(書憤)’ 단재 신채호

그 문턱은 그렇게 높았을까. 전근대에서 근대로 향하는 길. 그 문턱은 조선에서 식민으로 이른 가시밭길이었다. 장벽을 넘지 못하고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단재는 망국의 죄를 유학에 물었다. 유교에 절망하고 아나키즘으로 갔다.

‘유학자의 나라’ 조선이 넘지 못한 근대의 문턱을 넘어 이젠 21세기다. 과연 그 문턱은 높았다. 지금에 와서는 다시 ‘전근대’의 사유를 돌이키는 것이 어렵다. 조선의 유학이 근대를 넘보지 못했다면 근대의 한국인은 조선의 유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문턱에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

조선시대 선비의 필수품인 책, 붓, 먹 등 문방구를 그린 ‘책거리’ 민화. 조선 유학의 논쟁은 실용적인 데서 출발했으나 지나치게 경전의 텍스트 해석에 매몰됐다. 맹자는 “책을 모조리 다 믿을 양이면, 차라리 책이 없는 것이 낫다”고 경고한 바 있다. [중앙포토]

저자는 “동양철학은 여전히 비의적 안개 속에 있다. 전공자들도 솔직히 시인하고 있는 바이지만, 동양철학은 정말 어렵다. 수십 년을 매달리고도 실질의 그림자도 엿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라고 털어놓는다. 이러한 문명의 단절에는 무엇보다도 언어의 문제가 크다고 한다. 단지 한문에 어둡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다. 전공자들이 애써 한글로 풀어 써 준 글을 읽어도 이해가 쉽지 않다.

저자는 “식민지 경험은 고전 한자를 중심으로 하던 우리의 언어체계를 일본식 한자로 번안된 서구어 중심의 언어체계로 바꾸어 버렸다”고 지적한다. 전래의 용법에 기원을 두지 않는 번역 한자의 범람 때문에 사유가 교란된다. 이를 두고 저자는 “익숙한 한자라는 ‘트로이의 목마’를 타고 침입한 서구와 근대의 도전”이라고 표현한다.

이에 대해 책이 뚜렷한 해법을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는 “동양철학에서의 관건은 한문을 읽는 능력보다, 그것을 통해 사유하는 힘”이라고 강조한다. 한자를 읽지 못하는 서양 철학자가 주자학과 양명학의 핵심을 간취해 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퇴계와 대조적인 기풍을 지닌 동시대의 학자 남명 조식(1501~1572)의 호방한 독서풍이 참고가 될 수 있다. 그는 글자를 한 번에 열 줄씩 함께 읽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몸에 절실한 곳에 이르면 문득 받아들이고, 다른 것은 대강 지나갔다는 것이다.

『왜 동양철학인가』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등을 낸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이번에 두 권의 책을 한꺼번에 출간했다. 『왜 조선유학인가』가 지난 한 세기 동안 고립됐던 전통 사상의 유적을 발굴해 옛 선현의 마을을 되살려 놓은 것이라면, 『조선 유학의 거장들』은 그 마을의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집주인들의 수수께끼 같은 말의 기본 의미를 파헤친 책이다.

저자는 전통과 근대를 격리시키지도, 억지로 화해시키지도 않는다. 그는 “근대화는 전통의 기억을 지운 원흉이지만, 그 기억을 되살리게 한 은인 또한 근대화라는 사실이다. 근대화의 성공과 자신감이 없었다면 전통은 여전히 굳게 봉인된 채, 열어서는 안 될 상자 속에 갇혀 있을 것이다”고 말한다.

책은 ‘실학의 극복’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는 “실학은 식민사관의 결과이다. 식민사관과 실학 또한 서로 대립하지만, 공생적으로 얽혀 있다. 일제의 식민 지배가 없었다면 실학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한다. 일제 강점기 국학자들은 망국의 원흉 ‘조선 유학’에서 ‘실학’을 건져 내 근대의 기획을 읽어내려고 했지만, 이는 식민주의를 낳은 근대적 사유틀 속에서의 대항 담론에 그칠 수 있다. 굳이 ‘실학’이라고 근대적 외피를 입히지 않아도 조선 유학이란 사유의 바다는 넓다는 것이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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