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파벨 룽겐 감독 "라이프 인 레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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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7일 몹시도 낯선 형식의 영화 한편이 선보인다.91년 데뷔작인 『택시 블루스』로 칸영화제에서 최우수 감독상을 차지한 러시아 감독 파벨 룽겐의 최신작 『라이프 인 레드』.이 영화에는 마땅한 장르를 갖다 붙이기가 불가능하다.러시아에 여행갔다 마피아에 납치된 프랑스 청년 필립(뱅상 페레)이 투자자로 거액 사기극에 동원된다는 초반부의 설정은 범죄드라마를 연상시킨다.또 필립이 마피아 두목 파파(아르만 지가르 카니안)가 친딸처럼 아끼는 여자단원 옥사나(타냐 메체르키나 )와 사랑에 빠져 함께 파리로 탈출한다는 결말은 로맨틱 코미디의 사후처리를 답습한다.
그러나 영화를 이끌어 가는 연출방식은 전혀 다른 장르의 문법이동원된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는 필름 누아르의 인물들처럼 음습하고 잔혹하지만 동화적인 소박함을 갖고 있다.파파는 살인을 업무처리과정으로 생각하는 냉혈한이지만 옥사나에 관해서만은 늦자식을 둔 아버지이자 짝사랑에 목숨을 건 애인이 보여줄 수 있 는 온갖 작태를 다 연출한다.「터미네이터」란 별명을 가진 근육질의 단원은탈출하다 발각된 필립이 몸에 지닌 보석을 주자 소년처럼 좋아하며 못본 체한다.대전차용 로켓포탄을 쏘고 사람의 머리를 자르고배신자를 고문하는 이들의 행동은 공 포스러운 동시에 귀엽다.
이 영화는 이렇게 이질스러운 장르가 정교하게 얽힌 거대한 블랙 유머의 덩어리다.그래서 한 장르적 양식을 전제하고 따라가는관객은 계속 예상을 배신당한다.감독은 지독한 공포감을 느낀 다음 순간 바로 웃을 준비를 하라고 요구한다.이 영화에서 감독이관객의 눈을 유도하는 곳은 이질적인 장르와 장르 사이다.감독은그곳에 소련 붕괴이후 혼란에 빠진 러시아 사회의 파노라마를 블랙 유머의 형태로 농축시켜 놓았다.
룽겐 감독은 데뷔작부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공존하는 러시아에 몰두해 왔다.『라이프 인 레드』도 적색으로 상징되는 러시아의 혼란을 마피아란 상징적 존재를 통해 풍자한 작품이다.
마피아 두목 파파는 자본주의의 이념에 재빨리 편승해 부를 추구하지만 조직을 운영하는 방식은 지독하게 전체주의적이다.법을 어기는 사업을 하면서도 조직의 규칙을 준수하는데는 혁명가와 같은 엄숙함이 있다.한마디로 옛소련의 관료화된 공산 주의 체제와자본주의적인 탐욕이 어떻게 열성(劣性)결합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또 「터미네이터」는 10세정도 정신연령에 로봇 같은 완력을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이들을 통해 풍자되는 러시아는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위태롭게 지 고 있는 모습이다.거기에는 잔혹함과 천진난만함,문명과 미개함,폭력과 생명력이 공존한다.감독은 그 안에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발견한다.이질적인 장르를 충돌시켜 얻고자 했던 것은 이 아이로니컬한 상황이 갖는 긴장이 아니었을까.형식 자 체가 러시아의 혼란을 꼭 닮아 있는영화.잘 쓴 추리소설처럼 복잡하지만 자막이 올라갈 때면 필름을앞으로 되감고 싶게 만드는 영화다.
남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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