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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영화>伊 안토니오니감독 "구름 저편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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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나이 여든을 넘긴 거장이 13년만에 영화를 만들었다.82년 『여인의 동일성』을 마지막으로 긴 휴면기에 들어갔던 이탈리아 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그는 지난해 빔 벤더스와 함께 『구름 저편에』(원제:Beyond The Clouds )를 내놓았다.중풍으로 마비증세를 보이고 있는 83세의 나이에 영화를 만든 것 자체도 놀랍지만 그 내용은 더 놀랍다.그가 건드린 것은남녀간의 사랑과 성.네개의 에피소드를 엮은 이 영화에는 여자배우의 체모가 그대로 노출되는 장면이 여러번 등장한다.때문에 일본 개봉때는 큰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심의규정대로 하면 삭제해야 하지만 예술성을 인정한 영화윤리위원회가 처음으로 체모를 무삭제로 통과시켰기 때문.일본 영륜을 움직인 힘은 어디에서나온 것일까.
일본 개봉때 이 영화의 제목은 『사랑의 우연한 만남』이었다.
네개의 에피소드는 모두 남녀간의 만남과 사랑을 그린다.그 만남은 지극히 우연적이고 급진적이다.불량배를 물리치고 여자를 구했다든지,오랫동안 열정에 찬 연서를 보냈다는 식의 현실적 필연성이 전혀 없다.네개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남녀는 우연히 길을 묻거나 카페에서 마주치는 식으로 만난다.그러면서도 마치 오랫동안 서로의 주변을 맴돈 사람들처럼 곧바로 내면끼리 충돌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시는군요.난 삶이 두려운데요.저마다 삶을 무서워하죠.』『기대가 크니까 그런 모양이죠.』 삶이 두려워 신을열심히 섬기는 한 여자와 죽음을 의식해 사랑을 찾아 헤매는 남자는 길바닥에서 만난 그날 바로 이런 얘기를 나눈다.여자를 간절하게 원하는 남자의 태도에 여자는 일순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만 『내일 수도원에 들어가요』 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좀더일찍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순간이다.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사랑은 늘 사소한 만남으로 시작되지만 치명적으로 이별하고,조금씩 어긋나지만 완전한 소통을 꿈꾸게 만든다.감독이 생각하는 사랑은 극중 대사처럼 『바보짓이고 환상이고덫인줄 알면서도 너무 신비로워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사랑의 실체가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하지 않는다.불가지론자고 회의주의자인 그에게 실체는 구름 저 너머에 있는 알 수 없는 것이다.그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실체에 다가가려는 노력속에서 얻어지는 구름같은 이미지들 뿐이며 이 것이야말로 유일하게 허용된실체다.절대적인 사랑을 꿈꾸는 실바노가 연인 카르멘의 나신에 닿을듯 닿을듯 거리를 두고 애무하는 장면은 사물에 다가가는 안토니오니의 태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체모가 등장한다고 해서 화끈한 영화를 기대하면 오산이다.사랑에 대한 어떤 명쾌한 답변도 없고 아귀가 딱딱 맞는 스토리도 없다.모든 인물의 실루엣은점선으로 그려진다.점과 점 사이를 이어주는 내밀한 감정과 미세한 몸짓을 체감하지 못하면 절반을 잃는다.
유럽에선 안토니오니와 벤더스가 공동연출하고 존 말코비치.소피마르소.장 르노.이렌 야곱.벵상 페레등 호화 배역진이 출연하는다국적 합작영화로 주목을 끌었고 한국에선 체모 부분이 공륜에서어떻게 처리될까에 더 관심이 쏠렸던 영화.그 러나 27일 선보이는 국내 상영용은 가위질은 하지 않았지만 역시 체모부분을 뿌옇게 지운 필름이다.
남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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