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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포로 1만9천여명 추정-6.25 한국군 포로 실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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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방부가 최근 파악한 자료에 따르면 6.25 당시 북한의 포로가 된 인원을 포함한 국군 실종자수는 1만9천3백92명.
이는 국방부가 93년부터 금년초까지 6.25 당시의 병적대장과 유가족의 신고등을 통해 조사한 결과로 당초 실종자로 파악된국군은 4만1천9백54명이었으나 이중 2만2천5백62명은 전사로 추정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종 처리된 1만7천20명과 미확인 2천3백72명등 1만9천여명이 종전 뒤에도 우리측으로 송환되지 않았거나 포로로잡힌 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말 그대로 추정치일 뿐이다.
3년1개월여의 6.25기간중 전사자만도 국군및 유엔군 9만5천여명,인민군.중국군 1백42만여명의 인명피해를 내는 격전을 치른 만큼 정확한 피해를 산출하기가 사실상 어려운 것이다.
한국정부나 미국.북한.중국측의 인명피해 집계가 각기 다른 것도 전과를 부풀리려는 공산측의 의도등이 작용한 탓도 없지 않지만 혼전을 거듭한 게 무엇보다 크다.
우리 정부가 최근 정확한 실종자수등을 집계하기 전까지 공식 자료로 제시한 실종및 포로수도 8만2천3백18명이었다.그런데 조사결과 상당수가 중복 집계된 것으로 밝혀져 4만1천9백여명으로 최종 결론을 낸 것이다.또 이 가운데에서도 사 망시점이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2만여명은 전사로 분류해 미확인자를 포함한 실종자수는 1만9천여명이다.
한편 중국은 지난 90년 한국전을 다시 정리해 펴낸 『항미원조전사』에서 4만6천5백23명의 한국군 포로와 유엔군 포로를 잡았다고 밝히고 있으며 북한은 50년 12월30일 평양방송을 통해 6만5천명의 한국군을 포로로 잡았다고 발표했 었다.
이렇듯 포로등의 숫자는 상당히 엇갈리고 있는데 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전쟁 쌍방은 포로를 교환했다.당시 우리측은 북한에 억류중이던 한국군 8천3백33명,유엔군 5천1백24명등 1만3천4백57명의 아군 포로를 인수했 고 동시에 우리측이 보호하고 있던 북한및 중국군 포로 8만2천4백93명을돌려보냈다.
북한이 6.25가 발발한 50년말 주장한 한국군인및 미군 포로수 6만5천여명을 전제한다면 5분의 1만 송환된 셈이다.그들이 밝힌 포로수가 전과를 내세우기 위해 다소 과장됐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후 전쟁이 2년 이상 계속된 사실을 고려하면 상당수가 북한에 억류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측은 이에따라 53년부터 64년까지 군사정전위를 통해 송환되지 않은 아군포로 송환과 북측의 해명을 아홉차례나 요구했지만 모두 거부됐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냉담한 반응으로 포로 현황및 북한 억류실상,신원등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전쟁 직후 조사를 실시,포로로 잡힌 장소.시간은 물론 신원까지도 상세히 파악해놓고 이 기초자료를 근거로 북한과 유해송환 협상을 벌이는 미군의노력에 자극받아 뒤늦게 정밀 실태파악에 착수했다.국방부는 전쟁이 끝난지 41년이 지난 94년11월 「6.25 당시 실종자 송환촉구대책회의」를 소집해 북한억류 국군포로 명단을 전산화하고북한억류 실태조사에 나섰다.또 국 방부 정책실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송환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국방군사연구소의 김행복(金幸福)박사는 『6.25 당시 북한및중공군에 잡힌 국군 포로는 하루에 10시간 이상의 도보로 이동,벽동.화풍.평리등 압록강변에 있는 10여군데의 집단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면서 『이들중 많은 인원이 이동중 또는 수용소에서 숨졌다』고 말했다.
그는 또『그나마 생존자들도 70대의 고령이며 이들은 94년 북한을 탈출한 조창호(趙昌浩)씨의 증언대로 억류생활을 하거나 풀려나도 요주의 인물로 분류돼 일정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최하 층 생활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정부의 적극적 송환대책 추진과 국민적 관심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김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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