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은화는 탄생부터 비참했다. 고대 로마는 200년간 은 함유율 100%인 데나리우스 은화가 주름잡았다. 3세기부터 경제가 기울어지자 로마 은화도 찬밥 신세가 됐다. 슬쩍슬쩍 구리를 집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도미티아누스 은화는 구리가 95%나 되고, 은 함유량은 5%에 불과했다. 은 도금 동전이나 마찬가지. 세계가 거들떠 보지 않으면서 로마 은화는 기축통화의 기능을 상실했다.
로마 은화와 영국의 파운드, 미국 달러는 세계 역사를 지배한 기축통화다. 초강대국의 화폐가 국가 간 결제나 금융거래의 기본이 되면 수퍼 파워를 가진다. ‘시뇨리지 효과(화폐주조 차익)’가 대표적이다. 미국이 싼값에 달러를 찍어 외국 상품을 뭉텅이로 수입하는 식이다. 빚에 의존한 미국 경제가 그럭저럭 버텨온 배경에도 시뇨리지 효과가 숨어 있다.
하지만 태양이 마냥 중천에 떠있을 수만은 없는 법. 경제 체력이 달리거나 통화 가치가 불안하면 기축통화의 권위는 손상된다. 그 위상을 되찾는 유일한 해법은 ‘배젓 처방’이다. 19세기 영국의 금이 빠져나가고 파운드화가 기우뚱거리자 『이코노미스트』의 월터 배젓(Walter Bagehot) 편집장이 내놓은 권고다. 금리는 크게 올리되 우량 기업에는 화끈하게 돈을 푼 것이다. ‘배젓 처방’ 이후 파운드화는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
달러 가치가 연일 치솟는 이변을 연출하고 있다. 어제 원-달러 환율은 한때 1200원을 넘었다. 위기에 빠진 미 금융업체들이 해외에서 달러를 회수하면서 생긴 일시적 현상이다. 배젓 해법에 따르면 지금 미국은 반쪽짜리 처방이다. 금리는 올리지 않은 채 구제금융만 풀고 있다. 이대로 가면 결국 달러 가치는 주저앉기 십상이다. 파운드화처럼 기사회생하느냐, 도미티아누스 은화의 운명을 밟느냐…. 미국 달러화가 분수령에 섰다. 어쩐지 자꾸 ‘굿바이 달러’로 기우는 느낌이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