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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는 온 국민이 패션 모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1호 15면

여행 준비는 낭만적이라기보다 결단력을 요구하는 선택과의 싸움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북유럽 3개국과 아일랜드를 거쳐 서유럽 9개 도시를 두루두루 돌아봐야 하니까. 루트 짜기, 잘 것, 볼 것, 먹을 것, 인터넷과 취사 가능 여부 등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자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서른 셋, 서른 넷’ 부부의 유럽 여행기

하지만 이러고도 우리의 여행 계획은 출발 일주일 전까지 뭐 하나 진척된 것이 없었다. 세상을 2㎜로 쪼개 보는 남편은 아침 눈뜨자마자 환율을 체크하며 소수점 이하까지 외우고 있었지만 막상 유로를 구입하지는 않았다. 온갖 저가 항공을 섭렵하며 맥북 바탕화면에 19개의 사이트를 동시에 띄워 놨지만 돌아온 답은 본말 전도의 극치. “예약을 본격적으로 하려면 아무래도 커다란 모니터가 필요할 것 같아. 내친김에 노트북 하나 사는 거 어때?” 오, 지저스 크라이스트!

또 다른 여행 준비의 고충은 뭐니 뭐니 해도 ‘머니’. 몇 달 새 1200원대에서 1600원대까지 껑충 뛰어오른 유로는 악재 중의 악재였다. 여행 초반 코스가 북유럽 지역이었으므로 그 압박감은 더했다. 연애 시절 남편에게 가장 끌렸던 검소함이 이 대목에서 ‘샤방샤방’ 빛났다. 대형 여행가방에 종류를 달리한 라면과 미숫가루, 튜브형 고추장과 참치, 김을 가득 채우고는 세상 부러울 것 없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오~ 사랑스러운 나의 남편.

그런데 왜 하필 가난한 우리가 주제넘게 북유럽을 택했느냐고? 거기엔 나름 명분이 있다. 한 기관에서 발표한 행복지수 1위(행복하냐는 질문에 97%가 ‘그렇다’고 응답, 47%가 ‘아주 행복하다’고 응답) 국가가 덴마크였기 때문이다. 진짜? 선망과 의혹을 푸는 것으로 힘겹게 결행한 우리의 여행을 시작하고 싶었다.

덴마크 코펜하겐까지는 무려 38시간이나 걸렸다(비행기 삯을 아끼느라 일본에서 하룻밤 체류). 반면 동네 버스에서 내리듯 정겨운 미소와 함께 도장 찍기로 담백하게 이뤄지는 입국심사는 인상적이었고 유쾌했다. 코펜하겐의 첫인상을 묻는다면 그것만큼 쉬운 것도 없다.

It’s beautiful! 북유럽의 선선한 공기를 맡기도 전에 우리의 눈 사위를 가득 메운 것은 인형의 금발을 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산호색 눈을 빛내는 신비한 매력의 선남선녀들. 우리는 신혼부부라는 명분도 잊은 채 이게 웬 구경(떡!)인가, 정신없이 눈자위를 돌려댔다. 역을 빠져나가자 그 선남선녀들이 죄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 것 아닌가.

‘자전거의 나라’ 덴마크답다. 게다가 디자인의 나라답다. 아무렇게나 둘러맨 형형색색의 스카프, 짧은 재킷에 스키니 진, 길이를 저마다 달리한 부츠를 신고 시원시원하게 자전거 페달을 내밟고 있는 그들은 남편의 표현대로 ‘온 국민이 패션잡지 모델’감이었다.

그런데 어라, 이 남자가 호스텔에 들어와서까지 계속 덴마크 여자 예찬론일세. 은근 부아가 치밀어 올라 유치한 줄 알면서도 한마디 건넸다. “그 잘난 덴마크 남자들이 동양 여자랑 다니는 거 봤잖아. 동양 여자들이 매력이 있다는 증거라니깐.” 남편의 답변은 더 가관이었다.

만날 예쁜 것만 보다 보니 어쩌다 이국적인 매력에 끌린 것이라나.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스윽 쳐다보았다. 동그랑땡 같은 얼굴형에 납작한 콧대! 그러고는 남편을 쳐다봤다. 길쭉한 얼굴형에 쪽 째진 눈. 누가 누구한테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았다.

6.7㎡(2평) 남짓한 호스텔, 익히지도 못해 코펠 속에 10분째 잠들어 있는 군대에서만 먹는다는 일명 ‘뽀글이’ 라면. 그 옆에 초라하게 아가미를 벌리고 있는 참치 캔까지. 호스텔 창문 밖의 풍경과 대조적인 우리의 이 시추에이션에 나는 잠시 숙연해졌다. 이 상황을 감지한 남편은 조금 긴장했는지 내게 애교랍시고 하트를 그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일단 오늘은 피곤을 맥주 삼아 잠드는 게 상책이었다. 내일 두고 보라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아내 아임(I’m)과 완전 소심하고 꼼꼼한 남편 이미리(2㎜)씨. 너무 다른 성격의 서른 셋, 서른 네 살 부부가 ‘좌충우돌 부부 유럽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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