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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지리기행>29.한맺힌 땅서울의 낙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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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단종이 왕위에 오른 것은 열두살 때였다.열네살에 정순왕후 송씨와 혼인을 하지만 이듬해 왕위에서 쫓겨나 결국 영월에서 죽임을당한다.단종이 영월로 유배될 때 두분은 낙산에 있는 청룡사 우화루에서 이별을 했다.지금 우화루는 없다.송씨는 열다섯에 왕비가 됐다가 열일곱에 과부가 된 여인이다.그녀는 낙산의 끝자락 동망봉(東望峯)에 초가 암자를 짓고 시녀들의 구걸과 옷에 물감들이는 일로 연명을 한다.동쪽으로 떠난 임을 그리는 마음이 동망봉에 덮씌어졌지만 그녀 가슴에 남은 것은 애끓는 사랑 뿐만이아니라 원한의 감정 또한 못지 않았을 것이다.오늘 바로 그 낙산과 동망봉.청룡사를 본다.서울을 에워싸고 있는 네개의 주된 산줄기 북악과 인왕,낙산,그리고 남산과 관악,일컬어 현무.백호.청룡.주작의 사신사( 四神砂)인 것이다.이중 가장 극심하게 훼손된 산이 낙산이다.낙산의 모습은 대학로에서 전모를 가장 잘볼 수 있다.그러나 그 오름은 숭인네거리에서 창신초등학교 골목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좋다.
학교를 지나 쌍용아파트 조금 못미쳐 오른쪽 길가를 유심히 보면 「우산각터」라 새겨진 조그만 석비가 있다.집이 워낙 낡아 비만 오면 임금이 하사한 우산을 방안에 받치고 살았다는 세종 때 정승 유관(柳寬)과 지봉 이수광의 아버지로 선 조때 판서를지냈으며 유관 못지않게 청렴했던 이희검(李希儉)이 살았던 집터임을 기념하는 표지판이다.청렴은 가난이요,가난은 불편함이다.그것이 자랑일 수 있었던 사람과 시대가 부러울 뿐이지만,그러나 한 나라의 재상쯤 되는 사람들이 부서 져가는 집에서 살았다는 것이 정상은 아니다.더구나 그들의 집터가 성안이 아닌 성밖 낙산 자락이었다는 것을 우선 지적해두고자 한다.
그곳에서 지척에 청룡사(靑龍寺)가 있다.우리 풍수의 시조인 도선국사의 유언에 따라 왕건의 명으로 창건됐는데 이때는 태조5년(922년)으로 아직 후삼국이 통일되기 전이다.어려운 시기에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절이 하필이면 낙산에 서란 점도 아울러 기억해주기 바란다.뿐인가,공민왕의 폐비가 망국의 슬픔을 안고 스님이 돼 머문 곳 또한 이곳이요,광해군때 억울하게 죽은영창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중창한 곳도 이곳이요,역시 한많은사도세자의 원혼을 달랜 곳도 이곳 이다.한(恨)으로 도배를 한절인 셈이다.그러나 아무래도 그 압권은 앞서 얘기한 단종의 왕비 여산송씨일 것이다.
데 이 절을 이곳에 짓게 한 도선국사의 유언 내용이 범상치 않다.청룡사지의 기록에 의하면 『한양은 이씨의 5백년 도읍지요,개경은 왕씨의 5백년 도읍지인데 한양의 산세가 거악하고 험준하여 이씨 왕업의 운수가 날로 왕성해 질 것이니 한 양의 지기를 누르기 위하여 낙산의 산등에 절을 짓고 아침 저녁으로 종을울리라』고 돼 있다.낙산이 순양(純陽)의 목(木)이니 그에 운이 왕성하면 목성인 이씨가 잘 될 것이므로 양을 막기 위해 음인 비구니로 이 절을 지키게 하고 금인 종을 울려 목을 막으면(金剋木) 왕씨가 창성할 것이라는게 그 이유였다.개국의 마당에망할 때를 대비한 곳이 바로 여기라니 이 산의 운명은 처음부터그렇게 정해졌던 모양이다.
단종비 여산송씨의 시호는 숙종 때에야 정순왕후로 봉해진다.숙종의 둘째 아들인 영조는 단종비를 추모하는 뜻에서 비각을 세우고 그 현판에 「앞봉우리 뒷산과 함께 천만년을 기리리라(前峯後巖於千萬年)」는 친필을 내린다.그러나 그 비명에서 이곳을 「정업원의 옛터(淨業院舊基)」라 쓴 것은 잘못이다.본래 정업원은 창덕궁 서쪽에 있던 것으로 그것이 폐지된지 1백60년이나 지난다음이라 영조가 착각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
「정업원 구기」는 지금 청룡사 옆에 바로 붙어 있는데 출입문앞에는 트럭들이 즐비하게 주차돼 있고 철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영조의 친필을 관람할 수는 없다.뿐인가,안내문조차 뜰안에 세워놓았으니 도저히 그 내용을 읽을 수 없다.심기 가 불편하다.청룡사 총무보살께 그런 문제점을 지적하니 대답이 간단하다.전에는이곳 윤호 노스님(올 2월 세수 89세로 열반)이 잘 관리해왔으나 서울지방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관리권이 없어져 그들도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다.이런 식의 관리는 문화재 보호가 아니라 방치라 해야 맞을 일이다.
***이 곳에 터 닦아 산 사람들의 팔자가 그리 기구하니 산또한 편할 수 없었나 보다.절 올라가는 산 양쪽이 모두 사람 손에 의해 절단된 흔적이 역연하다.아니나 다를까 올해 아흔살의청룡사 보살할머니가 예전 채석장을 하며 돌을 캐내서 그 모양이됐다고 알린다.마흔다섯에 남대문 부근에서 외아들을 잃고 이곳에들어와 스님 덕에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는 이 노보살님은 낙산한의 마지막 편린이어야 할터인데.
동네 사람들이 동망산이라 부르는 동망봉은 청룡사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는 가까운 곳에 있다.둔덕 마루에는 잘 가꾸어진 놀이터와 소공원도 있다.아침 나절까지 비가 내리다 갠 오후여서인가 서울답지 않게 시야가 좋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 모그와 오존으로 소동을 빚던 하늘이 이럴 수도 있구나 싶으니 우리나라는 정말 천혜의 풍토라는 생각이 든다.
북한.도봉.수락.불암.용마.아차.남산은 손에 잡힐 듯하고 멀리로는 천마산 연봉도 눈에 들어온다.그러나 그런 시계 속에서도궁궐쪽은 완전히 막혀 있다.거리로 보자면 코 앞인데도.그렇다면이는 필시 단종비의 의도적인 입지 선택이 아니 었을지 싶다.산의 성격도 한이요,사람의 마음도 한으로 가득하다.한은 그런 식으로 땅을 가렸던 모양이다.
절 주변에는 선녀동자니 낙산보살이니 하여 점집들이 무척이나 많다.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무당일 것이다.그들 또한 일생에 한을 많이 쌓은 사람들일 터인데,여하튼 한 많은 터는 가만두지 못하는 것이 한 많은 사람들인가 보다.
낙산 꼭대기에 오른다.좀 조잡스럽게 복원된 서울 성곽이 길게꼬리를 물고 동대문을 향한다.물론 이곳에서는 북악과 궁궐이 보인다.그러나 청룡사와 동망봉은 보이지 않는다.여기까지 올라오는길은 구불구불하고 좁은데다 차는 많다.게다가 뭘 믿고 그러는지제법 달리기까지 한다.서울 산동네가 다 그러다시피 아이들은 골목길에서 천방지축으로 뛰노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위험천만이다.제발 낙산에서 또다른 한을 낳는 일이 더 벌어져서는 안되는데.주제넘은 걱정을 길가 포장집에서 막걸리를 마셔가며 해보지만,어쩌랴 기어코 사고를 하나 보고 말았다.허망하다.
〈풍수지리연구가.전서울대 교수〉 최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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