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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구사장은 화내고 있었다.
을희에게라기보다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화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아버지는 천석(千石)꾼의 막내였다.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활량으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꾀어 여행 다니는 것이 그의 생활 목적의 전부였다.그러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전답도 몽땅 팔고 집까지 저당잡힌 채 객사했다.어머니 는 을희네 집안 침모로 들어갔고 어린 구사장은 고모 집에 얹혀 자랐다. 어머니가 좀더 당차게 단속했더라면 아버지가 그처럼 처참하게 객지에서 죽지는 않았을 것이고,어머니가 좀더 여자답게 굴었으면 아버지의 바람기도 조금은 잠재울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바람기.
남자의 바람기가 어떤 것인지,이 성실하고 고지식한 구사장은 남자이면서도 잘 모르고 있다.
『천하의 양귀비(楊貴妃)도 백일홍(百日紅)이었답니다.』 침모가 어머니에게 하던 하소연이 생각난다.
『한 여자와 백일 이상 간 적이 없었으니까요.기생.작부.하인.여염집 아낙네…가리지 않고 두루 꾀고 꿰어찼지요.천석꾼 아들이니 천명은 꿰어야 한다나요.』 을희는 침모의 반짇고리에 숨겨져 있던 두눈박이 목근(木根)을 떠올렸다.시집오자마자 아들 하나 낳고 나서 내내 공방살이한 그녀는 그 나무토막 양근으로 공동(空洞)을 채우며 살았던가.정녕 잔인한 밤 얘기가 아닌가.
침모 남편의「천명꿰기」무용담은 일꾼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지고있었다. 『복숭아 다르고 자두 다르고 석류 다르고 배 다르고…천층만층으로 다른 것이 과일 맛이여.여자도 마찬가지라니께.』 늙수그레한 하인이 장작단을 쌓아올리며 침모 남편에 대해 말하던것을 귀담아 들은 적도 있다.
『왜 그 무엇인가,승두(僧頭)복숭아란 것도 있지 않는감요.』젊은 하인이 장작을 패며 화답하자 둘은 신나게 웃어댔다.
적든 많든 남자들에겐 이같은 「복수(複數)소유심리」가 있다.
그런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자학에 가까운 아내들의 인고(忍苦)는 어머니 세대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세대,아니 우리 딸의세대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출구가 없는 미로 안에서 헤매는 기분이었다.
남편이 「유부녀 유괴죄」로 고발된 것은 그 며칠 후의 일이다. 구사장네 감천 집에서 문제의 여인이 이사하기로 한 전날밤 그 여인의 남편이란 자가 들이닥쳤다는 것이다.
글=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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