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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숨겨진 것은 하늘 앞에 반드시 드러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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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 33면

이탈리아 로마의 바티칸 베드로 성당 앞에 있는 광장(Piazza San Pietro)에는 “로마와 전 세계에”(Urbi et orbi)라는 거창하고 장엄한 교황의 축복을 받으러 전 세계인이 모여든다. 바로크시대의 가장 위대한 조각가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가 설계한 이 베드로광장은 타원형으로 된 두 개의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회랑의 한쪽 끝은 베드로성당에 연결되어 있다. 알렉산더대왕이 이 지역을 평정하면서(BC 333) 헬레니즘의 주요 거점으로 등장하였고, 폼페이우스가 점령하면서(BC 64) 시리아 속주의 중심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페트라를 창조한 나바태안왕국과 교역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로마제국은 제국의 위용을 이 지역에 과시하기 위하여 거라사에 거대한 도시플랜을 구현시켰다. 예수가 이곳을 왔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예수의 활동 영역 속에 이곳이 들어 있었다. 임진권 기자

제6장
1 제자들이 예수께 여쭈어 가로되, “우리가 금식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오리이까? 구제는 해야 하오리이까? 음식 금기는 무엇을 지켜야 하오리이까?”
2 예수께서 가라사대,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
3 그리고 너희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
4 모든 것은 하늘 앞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5 감추인 것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고,
6 숨겨진 것은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라.”

73. 하늘과 알레테이아

본 장은 마태복음 6:1~18의 내용과 상조(相照)해 가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지난주에 설파하였다. 그런데 마태복음 6장의 내용 중에는 그 유명한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이 들어가 있다. 거짓된 공중기도(ostentatious prayer)와 중언부언하는 기도(repetitious prayer)를 혹평한 후에 모범적인 기도(model prayer)로서 주기도문이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은 누가에도 들어가 있다. 누가에서는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를 하나 가르쳐 달라고 예수에게 요청한다. 그 응답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누가의 기술이 큐복음서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마태복음 6:1~18의 내용 중에서 큐복음서에 속하는 주기도문 자료를 제외하면,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관한 예수의 경고는 공관복음에 나오지 않는 매우 유니크한 마태 자료로 간주되었으며, 아람어로 재구성이 가능한 매우 오리지널한 로기온파편으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어 왔다. 그런데 요번 도마복음의 발견으로 그 문제의식의 한 원형을 엿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도마에는 1)금식(Fasting) 2)기도(Prayer) 3)구제(Alms)의 순서로 되어 있고, 4)음식금기(Diet)가 첨가되었다.

제라시 원형광장과 제우스신전의 복원 그림/ 바티칸의 성베드로 광장.

음식금기를 유대민족들은 코셔(Kosher)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카셰르(kasher)에서 온 말이다. “제식에 합당하다(ritually fit, proper)”는 뜻이다. 음식의 경우 합당하지 않은 것은 ‘테레파(terefa, forbidden)’, 음식 이외의 것은 ‘파술(pasul, unfit)’이라고 한다. 음식금기의 리스트는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 상세히 나와 있다.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동시에 새김질하는 짐승은 먹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

따라서 소는 먹을 수 있지만, 낙타나 토끼는 새김질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아 먹을 수 없다. 돼지는 굽이 갈라졌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하여 먹을 수 없다. 물에 사는 것 가운데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부정하여 먹을 수 없다. 독수리·소리개·타조·올빼미·갈매기·박쥐 등등은 먹을 수 없다.

네 발로 걸으며 날개 돋친 곤충은 다 더러운 것이라 먹을 수 없지만, 땅에서 뛰어오를 수 있는 메뚜기·방아깨비·귀뚜라미는 먹을 수 있다. 이 외로도 복잡한 금기사항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1)도살이 ‘쉐히타(shehita)’라고 부르는 엄밀한 제식적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하며 2)하나님에게 속하는 생명의 자리인 피가 모두 제거되어야 하며 3)고기와 밀크(유제품)가 함께 요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출애굽기 23:19, 신명기 14:21 : 너희는 염소새끼를 제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 이러한 코셔 음식규정은 예수를 따르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어디까지 엄격하게 지켜져야 할지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단식의 문제만 해도 그것은 원래 유대인의 큰 절기인 속죄일(the Day of Atonement)에만 한정되었던 것인데(레위기 16:29~31, 23:27~32, 민수기 29:7), 나중에는 온갖 명목으로 단식을 수시로 행하였다. 예수시대에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했고, 『디다케』(사도의 가르침. 초대교회문헌) 제8장에 보면 초대기독교인들도 수·금으로 주 2회 단식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미 이사야 58장에 보면 단식의 허위성에 관한 통렬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당신께서 보아 주시지 않는데 단식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 그러면서 단식일만 되면 돈벌이에 눈을 밝히고 일꾼들에게 마구 일을 시키는구나. 그렇다! 단식한다는 것들이 시비나 일삼고 싸움이나 하고 가지지 못한 자를 주먹으로 치다니, 될 말이냐? 오늘 이 따위 단식은 집어치워라. 너희 호소가 하늘에 들릴 리 없다”(이사야 58:3~5. 공동번역).

여기 제자들이 금식·기도·구제·음식금기에 관해 예수에게 물었을 때, 그들은 과연 어떠한 마음자세를 가지고 그러한 질문을 던졌을까? 시시콜콜한 그 따위 타부(taboo) 준수나 허례허식적인 단식·기도·구제를 정녕코 하고 싶었기에 예수에게 물었을까?
“우리가 금식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어떻게 기도하오리이까? 나팔 불며 구제는 해야 하오리이까? 아무개 아무개 고기는 먹지 말아야 하오리이까?”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참으로 간결하다: “거짓말 하지 말라!(Do not lie).” 그들은 이미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하나님 눈치 보느라고 해야 하오리까, 말아야 하오리까 하고 질문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너희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Do not do what you hate!)” 공자는 제자 중궁(仲弓)이 인(仁)에 관해 묻자, “네가 원치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안연」2)”고 했다. 그러나 여기 예수 말은 훨씬 더 자성(自省)적이고 직재(直裁)하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군소리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남의 눈치 볼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하나님 규율은 다 엉터리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늘 앞에 드러나 있다(All things are disclosed before heaven). 여기 “하늘 앞에”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시야 속에(in the sight of God)”라는 표현과 같다.

하나님이 ‘하늘’로써 완곡하게 표현된 것도 보다 소박한 역사적 예수의 어법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말의 하늘, 동학의 하님, 공자의 천(天)과도 같다. “모든 것은 하늘 앞에 드러나 있다”는 우리말로 하면 “하늘이 다 안다” 정도의 어법이다. 재미있는 것은 옥시린쿠스사본에는 “하늘”이 “진리(알레테이아)”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진리 앞에 드러나 있다.” 하늘이 진리와 동의어로 표현되고 있다.

하늘이 곧 진리며 하나님인 것이다. 앞의 5장 2절이나 여기 6장 5~6절의 표현은 결국, 인간이 종교적이고자 하는 위선적 제식성과 형식성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아무리 감추려 하고 숨기려 해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 진리 앞에 다 나타나고 벗겨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계시는 묵시가 아닌 명명백백한 현시(顯示)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도마복음에서 큐45장(마 10:26~27, 눅 12:2~3)으로 발전해 간 생각의 루트를 더듬을 수 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비판한 누가 12:1~2의 맥락이 본래의 의미 맥락을 계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은밀한 것처럼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고, 미세한 것처럼 더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莫見乎隱, 莫顯乎微)”고 한 『중용』의 대지(大旨)를 여기서 같이 한번 상고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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